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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성한 삼일성 안에서 세 분의 관계
생명이시며 생명 주는 분이신 삼일 하나님
과정을 거치고 완결되신 삼일 하나님
삼일 하나님에 대한 전통적인 이단들

위트니스 리를 인용

제 8 장
복음서와 사도행전에 계시된 삼일 하나님

I. 일반적인 복음서들

마태복음 28:
19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5)으로 침례를 주고

195 삼일성에 대해 하나의 이름이 있다. 그 이름은 신성한 존재에 대한 총칭이며, 그분의 인격과 동등하다. 어떤 사람을 삼일성의 이름 안으로 침례 주는 것은 그를 삼일 하나님의 모든 어떠하심 안으로 잠기게 하는 것이다.
(위트니스 리 , 각주, 영문판 p.182)

신약의 첫 번째 책인 마태복음의 끝에서 주님은 처음으로 아버지, 아들, 영에 대해 분명히 말씀하셨고, “이름”이라는 단수를 사용하여 그들에 대해 말씀하셨다. 왜 이 발표가 이전에는 없었나? 왜냐하면 이 때, 주님이 죽고 부활하셨을 때, 아들이 아버지가 계획하신 모든 것을 성취하셨고, 그 영이 아들이 성취하신 모든 것을 사람 위에 적용하기 위해 오시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후 제자들을 아버지, 아들, 영의 이름, 즉 삼일 하나님 안으로 침례줄 수 있었다. 이 하나님은 계획하시는 하나님, 성취하시는 하나님, 그리고 적용하시는 하나님이다. 그분은 하나 안의 셋, 그리고 셋 안의 하나이신 -아버지, 아들, 그영이다.

앤드류 머레이는 “그리스도의 영”이라는 책의 20장에서, 여기서 우리가 말한 것을 확증하고 강화한다. 그가 말하길, “아버지 안에서 우리는 만물의 창조자이신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발견한다. 아들 안에서 하나님은 계시되시고 나타나셔서 가까이 오신다. 아들은 하나님의 형상이시다. 하나님의 영 안에서 우리는 내주하시는 하나님을 갖는다. 이는 사람의 몸에 거하는 하나님의 능력이며, 아버지와 아들이 우리를 위해 소유한 것을 그 속에서 역사하신다. 아버지께서 계획하시고 아들이 손에 넣으신 것은 오직 성령의 계속적인 간섭과 능동적인 역사를 통해서만 아직 육체 안에 있는 그리스도의 지체들 안에서 적용되며 효과를 볼 수 있다.”

시작도 없는 영원 안에서 아버지 하나님은 그의 갈망에 따라 계획하셨다. 시간 안에서 아들 하나님은 그것을 성취하셨다. 먼저 그분은 창조하셨다. 창조 후, 사람은 타락했고, 타락한 사람들을 구속하기 위해 사람이 되셨다. 소극적인 면에서 그분은 사람들을 구속하기 위해 죽으셨고, 적극적인 면에서 죽은 자들 가운데서 일어나시고 생명을 해방하여 아버지 하나님을 위해 많은 아들들을 산출했다. 그러므로 아버지 하나님의 계획을 성취했다. 그분의 죽음과 부활 후 그분은 영 하나님이 되셔 우리의 영 안으로 오셔서 삼일 하나님을 우리 안으로 넣으시고, 우리와 연결될 뿐 아니라, 하나로 연합되셨다. 이 시점에서 이 하나님은 너무 비밀스럽고, 너무 완전하며 충만하다. 오늘날 우리가 복음을 전할 때, 우리는 사람들에게 사람은 이런 하나님, 곧 우리의 구주와 생명과 만유이신 분이 필요하다고 말해야 한다. 사람들이 믿을 때, 우리는 그들을 삼일 하나님 안으로 침례준다. 그러므로 아버지, 아들, 영의 문제다.

(위트니스 리 , 삼일 하나님, 영문판 p.14-15)

마태복음과 요한복음은 하나님이 선택한 사람들의 참여와 누림을 위해 성경의 다른 모든 책들보다 삼일성이 더 충분히 계시된 책들이다. 요한복음은 특히 14장부터 16장에 걸쳐서 우리의 생명의 체험을 위해 아버지와 아들과 영 안에 있는 신격의 비밀을 계시한다. 한편 마태복음은 왕국 헌법을 위해 셋에 대한 하나의 이름 안에 있는 삼일성의 실제를 계시한다. 마태복음을 여는 장에서 성령(18절)과 그리스도(아들, 18절)와 하나님 (아버지, 2절)이 사람이신 예수를 낳기 위해 (21절)등장한다. 사람이신 예수는 여호와 구원자이며 우리와 함께 계신 하나님으로서 바로 삼일 하나님의 체현이시다. 마태복음 3장은 하늘이 열리고 침례의 물에 서 계신 아들에 관한 그림과 아들 위에 내려 앉은 비둘기인 그 영에 관한 그림과 하늘에서 아들에게 말씀하시는 아버지에 관한 그림을 제시한다(16절, 17절). 12장에서 사람의 인격 안에 있는 아들은 하나님 아버지의 왕국을 가져오기 위해 그 영을 힘입어 귀신들을 쫓아내신다(28절). 16장에서는 왕국의 생명 맥박인 교회 건축을 위해 아들이 아버지에 의해서 제자들에게 계시된다.(16절-19절). 17장에서 아들은 변형되었고(2절), 왕국의 나타남을 축소판으로 보여 주기 위해(16:28) 아버지의 기뻐하는 말씀으로(5절)확증되셨다. 결국 마지막 장에서는 마지막 아담이신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는 과정을 통과하시고 부활의 영역 안으로 들어가 생명 주는 영이 되신 후, 그분은 부활의 분위기와 실제 안에서 제자들에게 다시 오셨는데, 이는 이방인들을 삼일성의 이름 곧 그 인격과 실제 안으로 침례 줌으로써 그들을 왕국 백성으로 만들도록 제자들에게 명하시기 위해서였다. 그후 사도행전과 서신서들에서 사람들을 아버지와 아들과 영의 이름 안으로 침례 주는 것은 그리스도의 이름 안으로 침례 주는 것으로 계시된다(행8:16, 19:5, 헬라어). 그들을 그리스도의 이름 안으로 침례 주는 것은 그들을 그리스도의 인격 안으로 침례 주는 것이다(갈3:27, 롬6:3). 왜냐하면 그리스도는 삼일 하나님의 체현이요 생명 주는 영으로서 언제 어디서나 사람들이 그분 안으로 침례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마태복음에 의하면 아버지와 아들과 영의 실제 안으로 들어가는 그러한 침례는 천국을 이루기 위한 것이다. 하늘에 속한 왕국은 땅에 속한 사회와 같이 혈과 육을 가진 사람들(고전15:50)로 성립될 수 없다. 그것은 오직 삼일 하나님과의 연합 안으로 잠긴 사람들과 그들 안으로 역사된 삼일 하나님으로 터가 굳어지고 건축된 사람들로만 구성이 가능하다.

(위트니스 리 , 마태복음 라이프 스터디, 영문판 p.829-830)

요한복음 14장에 계시된 삼일 하나님

요한복음 14장 7절부터 11절까지에서 주님은 아버지에 대해 말씀하셨지만 어리석게도 빌립은 “주여 아버지를 우리에게 보여 주옵소서 그리하면 족하겠나이다”라고 구했다. 주님은 그들 가운데 그렇게 오래 계셨는데도 빌립이 그분을 여전히 알지 못하는 것에 놀라움을 표하셨다. 날마다 빌립은 그분과 함께 있었다. 그분을 보는 것이 곧 아버지를 보는 것임을 빌립은 깨닫지 못했던가? 어떻게 빌립은 아버지를 보여달라고 구할 수 있단 말인가? 주님은 아버지 안에 계셨고 아버지는 그분 안에 계셨다. 심지어 그분이 하시는 말씀조차도 그분 자신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었다. 아버지께서 그분 안에 거하시면서 그분의 일을 하고 계셨다. 빌립은 그분이 아버지 안에 계시고 아버지가 그분 안에 계심을 믿지 못했던가?

인간 관계에서는 아버지와 그의 아들이 하나가 아니다. 아들은 자기 아버지가 자기 안에 있다거나 자기가 아버지 안에 있다고 말할 수 없다. 그는 자기 아버지와 하나가 아닐 뿐 아니라 그의 아버지도 그가 말하고 있는 동안 일하지 않는다. 그런 하나는 땅에 속한 수준에서는 존재할 수 없다. 온 우주 안에서 오직 하나님의 아들만이 자신의 아버지와의 이런 관계를 말할 수 있으시다. 삼일성(Trinity)안에서는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 구별이 있다. 그분들은 둘이시다. 그러나 그분들은 하나이다. 왜냐하면 아들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는 아들 안에 있기 때문이다. 오, 놀라운 비밀이여!

빌립과 대화를 나누신 후 주님은 계속해서 더 이상한 것을 말씀하셨다(요14:16-18)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니”. 제자들은 이미 주님을 그들의 보혜사(위로자)로 소유했다. 그런데 지금 그분은 또 다른 분, 곧 실제의 영을 그들에게 보내도록 아버지께 구하겠다고 하신다. 첫 번째 보혜사는 다만 그들 가운데 계실 수 있었지만 이 두 번째 보혜사는 그들 속에 계실 것이었다. 주님은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고 말씀하셨다. 얼마나 이상한가! 두 분이 오고 계셨는가? 아니다. 오직 한 분만 오고 계셨다. 그 영의 오심은 주님 자신의 오심이었다. 보혜사가 그들 안에 계셨을 때 주님도 그들 안에 계셨다.

(위트니스 리 , 요한의 보수하는 사역, 영문판 p.30)

삼일성의 문제를 만질 때 우리는 자신의 이해에 미치지 못하게 된다. 나는 주님이 무엇을 말씀하시는지를 이해하고자 애쓰면서 이 장을 거듭거듭 반복하면서 연구했다. 읽으면 읽을수록, 연구하면 연구할수록 나는 더욱더 미로 속에 빠진 자신을 발견하게 되었다. 결국 나는 자신의 분석적인 연구에서 멀리 떠나 요한복음 14장을 기록된 그대로 받아들이게 되었다. 그 장은 아버지가 아들 안에 계시고 아들은 아버지 안에 계신다고 말해준다. 또 실제의 영이 오신다고 말한다. 그 실제의 영은 아버지와 아들을 실제가 되게 만드실 것이다. 그분들 중 한 분이 우리와 함게 계시는 것은 세 분 모두가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뜻이다. 그러나 그 세 분은 여기서 분리되어 있지 않으시다. 그분들은 하나이다.

당신의 체험을 생각해 보라. 당신은 아버지와 아들과 그 영을 갖고 있지 않은가? 그들은 어디에 계신가? 그분들은 당신의 영 안에 계시면서 동시에 하늘에서 보좌에 계신다. 이것이 우리가 누리는 하나님이다!

나는 형제회에 있었을 때 성령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아들의 이름으로 아버지께 기도하도록 가르침 받았다. 그리 흔하지는 않지만 어떤 환경들 아래서는 아들에게 기도하는 것도 옳았다. 그러나 그들은 우리가 성령께 기도해서는 절대로 안 된다고 말했다. 나는 그들의 가르침을 좇으려고 애썼지만 그것은 내게 번거로운 것임을 알게 되었다. 내가 기도 드리고 있는 아버지는 어디 계시는가? 기도할 때 어떻게 아버지와 아들을 구분 지을 수 있단 말인가? 그 영은 어디 계시는가? 결국에 가서 나는 이런 혼돈에서 벗어났다. 신약은 우리에게 말하기를 그 세 분은 모두 우리와 함께 계신다고 한다. 그 세 분은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은 영이시니”, 요한복음 4장 24절은 이렇게 말한다. 삼일성의 세 번째는 성령이시다. 아들이 부활 안에서 생명 주는 영이 되었다(고전15:45). 아버지가 영이시고 아들은 생명 주는 영이시고 성령은 또 다른 영이신가? 세 영이 계시는가? 분명히 그렇지 않다. 이 세 분은 한 영이시다. 내가 당신을 신학적인 혼돈이나 정신적인 혼란 속으로 이끌어들이려 한다고 생각지 말라. 나의 갈망은 다만 삼일 하나님에 대한 나의 누림을 당신과 함께 나누려는 것뿐이다! 내 안에 삼일 하나님을 모시고 있다니 나는 얼마나 행복한지!

(위트니스 리 , 요한의 보수하는 사역, 영문판 p.30-31)

요한복음 15장에 있는 삼일 하나님과 가지들

요한복음 15장은 14장보다 한층 더 영광스럽다! “내가 포도나무요 내 아버지는 그 농부라”. 주님은 이렇게 선포하셨다. 이 그림 안에 함축된 의미를 생각해 보라. 아버지는 이 포도나무의 근원이요 기원이시다. 이 포도나무는 아버지에 의해 심겨졌고 또 그 분에 의해 경작되고 공급받는다. 그분은 그것의 토양이요, 햇빛이요, 공기이시다. 아들은 한 그루의 포도나무로서 아버지를 체현하고 있다.

요한복음 15장 26절에 이를 때 그 영이 나온다. “내가 아버지께로서 너희에게 보낼 보혜사 곧 아버지께로서 나오시는 진리(실제)의 성령이 오실 때에 그가 나를 증거 하실 것이요”. 여기서 “께로서”라고 두 번 번역된 헬라어 전치사는 이에 정확히 해당되는 영어 단어가 없다. 그것은 “-로부터 함께(from with)"를 뜻한다. 그 영은 아버지로부터 아버지와 함께 오신다. 그 두 분은 분리될 수 없으시다. 즉 그 영이 임하시면 아버지도 임하신다.

이는 아들의 경우에도 그러하다. 그분은 아버지로부터 아버지와 함께 오셨다. 이 땅 위에 계시는 동안에 그분은 혼자가 아니셨다. 아버지가 그분과 함께 계셨다(요8:16, 29). 그분이 어디에 계시든지 아버지도 그곳에 계셨다. 삼일성의 셋은 구별은 되지만 분리할 수 없다. 우리가 아버지를 가질 때 아들도 갖는다. 아들을 가지면 아버지도 갖는다(요일2:23). 아들과 더불어서 우리는 그 영을 갖는다. 아버지는 포도나무의 근원이시다. 아들은 포도나무이시다. 그 영은 포도나무의 생명즙이시다.

(위트니스 리 , 요한의 보수하는 사역, 영문판 p.31-32)

이 큰 포도나무는 삼일 하나님의 유기체이다. 아버지의 모든 어떠하심이 이 유기체 안에 있으며 삼일성의 두 번째인 이 포도나무 안에 체현되어 있다. 포도나무 속에는 그 영의 순환하는 생명의 흐름이 있다. 포도나무와 그 가지들을 유지하기 위해 아버지의 풍성을 옮기시는 분은 바로 그 영이시다. 우리가 접붙임 받은 곳은 바로 이 포도나무 안으로이다. 우리는 삼일 하나님의 이 유기체 안으로 접붙인 바 되었다!

이것이 우리가 신격화된다는 뜻이겠는가? 나는 신격 안에 넷-아버지, 아들, 그 영, 교회-이 있다고 가르친다는 참소를 받아왔다! 우리는 경배의 대상이 아니다. 그러나 분명히 우리는 신성한 생명과 신성한 본성을 갖고 있다. 가지들은 의심할 여지없이 포도나무의 생명과 본성을 갖고 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들이다.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이시므로 확실히 우리는 그분의 생명과 본성을 소유하고 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몸이다. 분명히 우리는 머리와 하나이다.

요한복음 14장은 우리에게 아버지와 아들과 그 영의 관계를 밝힌다. 요한복음 15장은 더 나아가서 포도나무와 그 가지들에 대해 말한다. 요한복음 16장은 다시 한번 삼일 하나님에 대해 말한다.

(위트니스 리 , 요한의 보수하는 사역, 영문판 p.32-33)

우리의 체험과 누림을 위한 요한복음 16장에 있는 삼일성

“그러하나 진리(실제)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실제)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 그가 내 영광을 나타내리니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겠음이라 무릇 아버지께 있는 것은 다 내 것이라 그러므로 내가 말하기를 그가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리라 하였노라”(16:13-15). 아버지가 소유하신 것은 다 아들의 것이다. 그러므로 아들은 아버지의 체현이다. 아들이 가진 모든 것이 다 그 영께 주어진 바 되었다. 그 영은 그러므로 아들의 실제화이다. 그리고 그 영은 가지신 모든 것을 우리에게 전달해 주신다. 이 순서에서 우리는 모든 것이 결국 우리의 것이 되었음을 알 수 있다! 아버지가 가지신 모든 것은 아들에게 속하게 되었다. 아들이 가지신 것을 그 영이 받으신다. 그 영은 자신이 가지신 것을 우리에게 열어 보여 주신다. 그 영, 아들, 아버지는 모두 우리의 소유이다.

당신의 체험이 이것을 확증할 것이다. 분명히 당신은 그 영이 속에 계신다는 것을 확신한다. 이 영은 아들의 실제화이다. 당신 속에 계신 아들은 아버지의 체현이시다. 당신 속에 세 분이 모두 계신다는 것을 어떻게 아는가? 그 영에 의해서이다. 그분은 당신에게 참으로 실제가 되신다. 당신이 슬픔 가운데 있을 때 위로하시고 당신이 어둠 속에 있을 때 빛을 비추시고 당신이 곁길로 벗어나려고 할 때 당신에게 괴로움을 줄 것이다. 당신은 구원받기 전에 그런 체험을 해본 적이 있는가? 이 내적인 부축과 공급은 당신이 그분을 믿은 연후에야 당신의 것이 되어왔다. 속에 계신 이 풍성한 분은 아버지의 체현이신 아들의 실제화이다. 그러므로 삼일 하나님께서 당신 속에 계신 것은 당신의 매일의 누림, 매순간의 누림을 위한 것이다!

삼일 하나님의 풍성을 밝히 드러내는 이 세 장-요한복음 14장, 15장, 16장-이 끝난 뒤 아들께서는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기도하셨다. “아버지여 때가 이르렀사오니 아들을 영화롭게 하사 아들로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게 하옵소서”(17:1). 어떻게 이 영화롭게 되심이 있을 수 있는가? 그것은 바로 믿는이들의 하나에 의해서였다(11절, 21절, 22절, 23절)

(위트니스 리 , 요한의 보수하는 사역, 영문판 p.33-34, 33-34)

요한복음 17장에 있는 믿는이들의 하나
(1)아버지의 이름 안에서와 그분의 생명에 의해서

아들은 아버지께서 그분께 주신 모든 자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분배해줄 권세를 받으셨다(2절). 이제 그분은 “거룩하신 아버지여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저희를 보전하사 우리와 같이 저희도 하나가 되게 하옵소서 내가 저희와 함께 있을 때에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저희를 보전하와 지키었나이다”(11-12절)라고 기도하셨다. 생명과 이름은 분리할 수 없다. 아버지의 생명이 없다면 어떻게 우리가 그분의 이름을 가질 수 있겠는가? 만일 우리가 그분에게서 나지 않았다면 그분은 우리의 아버지가 아닐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생명을 가졌기 때문에 그분은 우리의 아버지이시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분을 “아바 아버지!”라고 부른다.

(2)말씀에 의해

믿는이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것 외에도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내가 아버지의 말씀을 저희에게 주었사오매 세상이 저희를 미워하였사오니 이는 내가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같이 저희도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을 인함이니이다...저희를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니이다 아버지께서 나를 세상에 보내신 것같이 나도 저희를 세상에 보내었고 또 저희를 위하여 내가 나를 거룩하게 하오니 이는 저희도 진리로 거룩함을 얻게 하려 함이니이다 내가 비옵는 것은 이 사람들만 위함이 아니요 또 저희 말을 인하여 나를 믿는 사람들도 위함이니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같이 저희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14-21절).

주님이 믿는이들에게 주신 말씀은 그들을 세상과 분별되게 한다. 그들은 세상에 속해 있지 않고 그분께 속해 있다. 이 거룩케 하시는 말씀은 그들을 지켜주며 심지어 그들이 세상에 남아 있을 때도 그러하다.

그러므로 말씀, 생명, 이름을 통하여 믿는이들은 하나안으로 이끌어졌다.

(3)영광에 의해서

“내게 주신 영광을 내가 저희에게 주었사오니 이는 우리가 하나가 된 것 같이 저희도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이니다 곧 내가 저희 안에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 저희로 온전함을 이루어 하나가 되게 하려함은”(22-23절). 아들은 아버지의 생명과 본성을 받았으므로 아버지를 표현한다. 아들의 영광이란 곧 그분이 아버지의 생명과 본성을 가짐으로써 아버지를 표현하는 것이다. 가령 대통령에게 한 아들이 있는데 그를 자기의 대표로 파송 한다고 하자. 이 아들의 영광은 곧 생명과 본성에 있어서 그 대통령을 표현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아들은 그가 표현하기 위한 아버지의 생명과 본성을 가졌다는 점에서 아버지로부터 영광을 받는 것이다.

아들의 이 영광을 그분이 우리에게 주셨다. 우리는 아버지의 생명과 본성을 함께 공유하고 있으므로 그분을 표현할 지위와 권리를 갖고 있다. 우리는 이 영광을 갖고 있다!

우리는 생명으로 말미암아 그 이름 안에서, 말씀에 의해, 영광 안에서 하나 안으로 이끌어졌다. 이 하나는 삼일 하나님 안에 있는 하나이므로 참된 것이다. 우리는 그러한 하나 안에서 그분과 연합되었다.

우리는 이 참된 하나를 위하여 여기에 있다. 그분의 생명으로 말미암은 아버지의 이름 안에서의 하나, 우리를 세상에서 분별시키는 그분의 말씀에 의한 삼일 하나님 안의 하나, 하나님을 그분의 생명과 본성으로 표현하는 영광 안의 하나, 이것이 곧 아들과 아버지의 영화롭게 되심이다! 또한 이것이 바로 교회생활이다.

(위트니스 리 , 요한의 보수하는 사역, 영문판 p.34-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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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I. 누가복음 15장 - 죄인을 향한 삼일 하나님의 사랑

누가복음 15장
3절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 1비유로 이르시되
4절 너희 중에 어느 사람이 양 일백 마리가 있는데 그 중에 하나를 잃으면 아흔 아홉 마리를 들에 두고 그 잃은 것을 찾도록 찾아 다니지 아니하느냐
8절 어느 여자가 열 드라크마가 있는데 하나를 잃으면 등불을 켜고 집을 쓸며 찾도록 부지런 히 찾지 아니하겠느냐
11절 또 가라사대 어떤 사람이 두 아들이 있는데
12절 그 둘째가 아비에게 말하되 아버지여 재산 중에서 내게 돌아올 분깃을 내게 주소서 하는지라 아비가 그 살림을 각각 나눠 주었더니
13절 그 후 며칠이 못 되어 둘째 아들이 재산을 다 모아 가지고 먼 나라에 가 거기서 허랑 방탕하여 그 재산을 허비하더니
14절 다 없이한 후 그 나라에 크게 흉년이 들어 저가 비로서 궁핍한지라
15절 가서 그 나라 백성 중 하나에게 붙여 사니 그가 저를 들로 보내어 돼지를 치게 하였는데
16절 저가 돼지 먹는 쥐엄 열매로 배를 채우고자 하되 주는 자가 없는지라
17절 이에 스스로 돌이켜 가로되 내 아버지에게는 양식이 풍족한 품군이 얼마나 많은고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
18절 내가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르기를 아버지여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얻었사오니
19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치 못하겠나이다 나를 품군의 하나로 보소서 하리라 하고
20절 이에 일어나서 아버지께로 돌아가니라 아직도 상거가 먼데 아버지가 저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3목을 안고 입을 맞추니
21절 아들이 가로되 아버지여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얻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치 못하겠나이다 하나
22절 아버지는 종들에게 이르되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가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라
23절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으라 우리가 먹고 즐기자
24절 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 하니 저희가 즐거워하더라

31 스스로 의롭다하는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죄인들과 함께 먹는 문제로 주님을 비난할 때, 구주께서는 세가지 비유를 사용하여, 신성한 삼일성이 어떻게 아들을 통하여 그 영에 의해 죄인들을 아버지께로 이끄는가를 계시하고 설명하셨다. 아들은 잃어버린 양인 죄인을 찾아 집으로 데리고 오기 위해 인성 안에서 목자로 오셨다(4-7절). 그 영은 여인이 잃어버린 동전을 발견할 때까지 주의 깊게 찾듯이 죄인들을 찾으신다(8-10절). 그리고 아버지께서는 한 남자가 부도덕한 아들을 영접하듯이, 회개하고 돌아온 죄인을 영접하신다(11-2절). 신성한 삼일성 전체가 죄인을 귀히 여기고 그를 하나님께로 다시 이끄는 데 참여한다. 세 비유는 모두 참회하는 죄인의 타락한 상태와 회개보다는 신성한 삼일성의 사랑을 더 강조한다. 신성한 사랑은 선한 목자이신 아들의 친밀한 돌봄에서, 보물을 사랑하는 분이신 그 영이 세밀히 찾는 데에서, 사랑스런 아버지이신 천부의 따뜻한 영접에서 완전히 표현된다.
(위트니스 리 , 각주, 영문판 p.355)
203 따뜻하고 사랑스런 영접. 탕자가 아버지께로 돌아온 것은 그 영의 찾으심 때문이었다(8절). 아버지께서 돌아온 아들을 맞아들이신 것은 아들의 구속 안에서의 찾으심에 근거한 것이었다(4절).
(위트니스 리 , 각주, 영문판 p.357)
세 가지 비유

다음의 세 가지 비유는 하나님이 사람을 찾으시되 최후의 한 사람까지 찾으시는 삼중의 그림을 보여 준다. 잃은 양의 비유는 어떻게 목자가 아흔 아홉 마리의 양을 버려 두고 잃은 한 마리 양을 찾으러 가는지를 말해 준다. 이것은 선한 목자이신 아들이 우리를 위해 구속을 성취하심에 대한 그림이다. 두 번째 비유에서 나오는 여자는 촛불을 켜고 집을 쓸며 잃은 동전을 찾는다. 하나님께서 택하신 죄인들인 우리는 동전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소유였지만 잃은 바 되었다. 여자는 보내심을 받아서 우리의 집, 곧 속 부분의 방들을 빛 비추므로 우리를 찾고자 하는 성령이시다. 마지막 비유는 탕자의 비유로서 돌아온 죄인을 영접하시는 아버지를 보여 준다.

마치 아버지께서 회개한 죄인을 받으시는 것이 그 영의 찾으심의 열매인 것과 같이 그 영의 빛 비추는 역사는 아들의 구속의 기초에 근거를 둔다.

(위트니스 리 , 생명 메시지, 영문판 p.261-262)

누가복음 15장은 세 비유를 기록하고 있는데 잃어버린 양을 찾는 목자, 잃어버린 동전을 찾는 여인, 그리고 방탕한 아들을 기다리는 아버지의 비유가 그것이다. 주 예수는 우리를 찾아 구속하기 위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시려고 목자로 오셨다. 그리스도의 역사 후에 성령이 우리를 되돌려오기 위해 우리 마음 안에서 찾으며 비추시는 여인으로 오셨다. 성령의 찾는 역사로 말미암아 우리는 회개하고 기쁘게 받으시는 아버지께로 돌아온다. 그때 우리는 문으로 들어왔다. 신격의 세 인격이 바로 우리를 건축 안으로 이끄셨다. 그분들은 땅의 네 모퉁이로부터 온 누구에게나 입구이시다. 이것은 삼일 하나님의 누림 즉 하나님의 사랑, 그리스도의 은혜, 성령의 교통 안으로 들어가기 위한 고린도 후서 13장 13절에 있는 말씀과 일치한다.

(위트니스 리 , 하나님의 건축의 이상, 영문판 p.200-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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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II. 사도행전에 있는 삼일 하나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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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주님의 이름을 부름

사도행전 2장
21절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1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211 주님의 이름을 부르는 것은 신약과 더불어 시작된 새로운 실행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창세기 4장 26절에서 인류의 셋째 세대인 에노스에게서 시작되었다. 그 실행은 그 후로 욥(욥12:4, 13:4, 21:33), 이삭(창26:25), 모세와 이스라엘 자손들 (신4:7), 삼손(삿15:18, 16:28), 사무엘(삼상12:18, 시99:6), 다윗(삼하22:4,7, 대상16:8, 21:26, 시14:4, 17:6, 18:3, 6, 31:17, 55:16, 86:5, 7, 105:1, 116:4, 13, 17, 118:5, 145:18). 시편 기자 아삽(시80:18), 시편 기자 헤만(시88:19), 엘리야(왕상18:24), 이사야(사12:4), 예레미야(애3:55, 57)와 그 밖의 사람들(시99:6)로 계속되었다. 구약 시대에도 그들은 모두 이것을 실행했다. 이사야도 또한 하나님을 찾는 자들에게 그분을 부르라고 권면했다(사55:6). 이방인들도 이스라엘의 선지자들에게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습관이 있음을 알았다. (욘1:6, 왕하5:11). 북방에서 하나님께서 일으키신 그 이방인도 하나님의 이름을 불렀다(사41:25)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을 부르는 것은 하나님의 명령이요(시50:15, 렘29:12)갈망이다(시91:15, 습3:9, 슥13:19). 이것은 하나님의 구원의 우물에서 마시는 기쁜 길이고(사12:3-4), 하나님 안에서 기뻐하는, 즉 그분을 누리는 누림직한 길이다(욥27:10). 그러므로 하나님의 백성은 매일 그분을 불러야 한다(시88:9). 요엘은 신약 희년에 관해 그러한 기쁨에 넘치는 실행을 예언했다(욜2:32)
신약에서 주님의 이름을 부르는 것은 요엘의 예언의 성취로서 여기서 오순절 날 베드로에 의해 처음으로 언급되었다. 이 성취는 하나님께서 만유를 포함한 영을 그분의 택하신 백성위에 경륜적으로 부어주시는 것과 관계되는데, 그것은 그들로 그분의 신약 희년에 참여케 하려는 것이다. 하나님의 신약 희년에 관한 요엘의 예언과 성취에는 두 방면이 있는데, 하나님 편에서는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승천 안에서 그분의 영을 부어주신 것이고, 우리 편에서는 우리가 모든 것을 성취하고, 모든 것을 달성하고, 모든 것을 얻은 승천하신 주님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다. 그리스도 안의 믿는이들인 우리가 모든 것을 성취하고, 달성하고, 얻고, 소유하신 만유를 포함한 그리스도께 참여하고 누리는 것은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다(고전1:2). 그것은 우리의 완전한 구원을 위해 우리로 과정을 거친 삼일 하나님을 누리게 하는, 하나님의 신약 경륜 안의 주요한 실행이다(롬10:10-13). 초기의 믿는 이들은 주님의 이름 부르는 것을 어디에서나 실행했고(고전1:2), 그것은 믿지 않는 사람들, 특히 핍박하는 자들에게 그리스도의 믿는이들의 보편적인 표시가 되었다(9:14, 21). 스데반은 핍박을 당할 때 이것을 실행했고(7:59). 그의 실행이 그를 핍박하던 사람들 중 하나였던 사울에게 인상을 주었음이 분명하다(7:58-60, 22:20). 그때에 믿지 않던 사울은 이름 부르는 사람들을 핍박했다(9:14, 21). 사울이 주님께 붙잡힌 직후에 그를 그리스도의 몸의 교통 안으로 인도한 아나니아는 그에게 침례 받고 주님의 이름을 불러 그도 그렇게 이름 부르는 사람이 되었음을 다른 사람들에게 보이라고 명했다. 디모데후서 2장 22절에서 바울은 디모데에게 한말로써 초기에 주님을 추구하던 모든 사람들이 그렇게 이름 부르기를 실행했음을 가리켰다. 의심할 바 없이, 그는 이것을 실행한 사람이었는데, 이는 그가 젊은 동역자 디모데에게 자기처럼 주님을 누릴 수 있도록 이것을 행하라고 분부했기 때문이다.
“이름을 부르다”에 해당하는 헬라어 단어는 “위에”라는 말과 “(이름을)부르다”라는 말로 구성되었으며, 그것은 스데반이 했던 것처럼(7:59-60) 알아들을 수 있게, 심지어 큰 소리로 부르는 것이다.
(위트니스 리 , 각주, 영문판 p.529-530)

사도행전 7장
59절 저희가 돌로 스데반을 치니 스데반이 부르짖어 가로되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하고

사도행전 9장
14절 여기서도 주의 이름을 1부르는 모든 자를 결박할 권세를 대제사장들에게 받았나이다 하거늘

141 초기에는 주님의 이름 부르는 것이 주님을 따르는 사람들의 표시였음을 가리킨다(고전1:2). 이렇게 부르는 것은 틀림없이 다른 사람들이 들을 수 있을 정도로 소리가 컸을 것이다. 따라서 그것이 표시가 되었다
(위트니스 리 , 각주, 영문판 p.569)

주의 이름을 부름의 정의

먼저 우리는 주의 이름을 부름의 의미를 알 필요가 있다. 어떤 그리스도인들은 주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 그분께 기도하는 것과 같다고 생각한다. 전에는 나도 똑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어느 날 주님은, 그분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 단지 그분께 기도하는 것과는 다름을 보여 주셨다. 그렇다, 부르는 것은 기도의 일부이기 때문에 기도의 한 형태이다. 그러나 부름은 단지 기도만이 아니다. “부르다”라는 히브리어 단어는 “외치다” “호소하다”, 즉 “부르짖다”를 뜻한다. 바꿔 말해서 부르는 것은 그가 들을 수 있도록 그 사람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다. 기도는 속으로 할 수 있지만 부르는 것은 들리게 해야 한다.

주님을 부르는 것은 그분께 부르짖는 것이며 영적인 호흡을 체험하는 것이다.“여호와여 내가 심히 깊은 구덩이에서 주의 이름을 불렀나이다 주께서 이미 나의 음성을 들으셨사오니 이제 나의 호흡과 부르짖음에 주의 귀를 가리우지 마옵소서” (애3:55-56). 이 구절들은 부름이 또한 부르짖음과 호흡임을 나타낸다. 부르짖음은 가장 좋은 호흡이다. 어린아이에게 있어서 부르짖음은 가장 좋은 실행이다. 부르짖을 때마다 당신은 자연스럽게, 깊이 호흡하게 된다. 부르짖고 호흡함으로써 우리는 내쉬고 들이마신다. 들이마심은 하상 내쉰 다음에 있다. 내쉼으로써 우리는 모든 소극적인 것들을 내뿜는다. 소극적인 것들을 내뿜을 때마다 주님의 적극적인 것들이 당신을 채울 것이다. 화 내는 것을 예로 들어 보자. 화가 나오려고 할 때 당신은 억누르려고 노력하지 말고 다만, “오 주 예수여!”라고 부르라. 그런 다음, “주 예수여, 나는 지금 화를 내겠습니다”라고 짦게 기도하라. 이렇게 한 후에도 여전히 화를 낼 수 있는지를 보라. 주의 이름을 부름으로써 당신은 화를 내쉬고 주 예수를 들이마신다. 당신은 화를 내쉬고 주님을 들이마시게 될 것이다. 당신은 거룩하게 되기를 원하는가? 거룩하게 되는 길은 주 예수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다. 그분의 이름을 부름으로써 당신은 죄 있고 악하고 더러운 모든 것들을 내쉬고 적극적인 모든 것들-주님의 풍성-을 당신 안에 들이마시게 될 것이다.

(위트니스 리 , 창세기 라이프 스터디, 영문판 p.334-335)

주님을 어떻게 부르는가

이제 우리는 주님을 어떻게 불러야 하는지를 생각해 보자. 먼저, 우리는 순수한 마음으로 그분을 불러야 한다(딤후2:22). 근원이 되는 우리의 마음은 주님 자신만을 추구하는 순수한 마음이어야 한다. 둘째로, 우리는 순수한 입술로 불러야 한다(습3:9. 히브리어참조). 느슨한 말보다 더 우리의 입술을 더럽히는 것이 없기 때문에 우리는 말을 조심해야 한다. 만일 느슨한 말로 인해 우리의 입술이 순수하지 않다면 주님을 부르기 어려울 것이다. 순수한 마음과 순수한 입술에 더하여 우리에게는 열린 입이 필요하다(시81:10, 7절 참조). 우리는 입을 크게 벌려서 주님을 불러야 한다. 더욱이 우리는 단체적으로 주님을 불러야 한다.

디모데 후서 2장 22절은 이렇게 말한다. “또한 네가 청년의 정욕을 피하고 주를 순수한 마음으로 부르는 자들과 함께 의와 믿음과 사랑과 화평을 좇으라”. 우리는 주의 이름을 부르기 위해 함께 모일 필요가 있다. 시편 88편 9절은, “여호와여 내가 매일 주께 부르며”라고 말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매일 그분의 이름을 불러야 한다. 주의 이름을 부르는 것은 교리가 아니다. 그것은 매우 실제적인 것이다. 우리는 이것을 매일 매시간 실행할 필요가 있다. 우리는 호흡을 멈추면 안 된다. 우리 모두는 호흡이 멈출 때 어떻게 되는지를 안다. 더욱이 시편 116편 2절은, “내가 평생에 그분을 부르리로다”(원문 참조)라고 말한다. 살아 있는 한, 우리는 주의 이름을 불러야 한다. 나는 더 많은 주님의 백성들, 특히 새로운 사람들이 주님을 부르는 이 실행을 시작하기 바란다. 그렇게 할 때 당신은 그것이 주님의 풍성을 누리는 최상의 길임을 보게 될 것이다.

(위트니스 리 , 창세기 라이프 스터디, 영문판 p.3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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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 주님의 이름 안으로 침례 받음

마태복음 28장
19절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침례를 주고

사도행전 8장
16절 이는 아직 한 사람에게도 성령 내리신 일이 없고 오직 주 예수의 이름으로 침례만 받을 뿐이더라

사도행전 19장
5절 저희가 듣고 주 예수의 이름으로 침례를 받으니

갈라디아서 3장
27절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여 침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입었느니라

부활하신 그리스도는 과정을 거치신 하나님이다. 성육신 전에 그분은 “날것(raw)"하나님이셨으나, 지금 그분은 충만한 과정을 거치셨다. 하나님에게 성육신은 정말 과정이었다. 그분께 삼십 삼 년 반 동안 이 땅에 사시고, 가난한 가정에서 자라시고, 종교에 의해 핍박받고, 마지막으로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 또한 진짜 과정이었다. 그 후 그분은 죽음을 통과하여 부활 안으로 들어가셨다. 부활로서 그분은 충만히 과정을 거치시어 생명주는 영이 되셨다.

그가 충만히 과정을 거치신 후에, 주님은 제자들에게 와서 말씀하셨다.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침례를 주고”(마 28:18-19, 원문참조). 오늘날 우리는 반드시 그러한 권위로 복음을 전해야 한다. 우리는 모든 족속을 제자 삼을 권세를 받았다. 그리고 우리는 반드시 그들을 삼일 하나님의 이름 안으로 침례주어야 한다. 갈라디아서 3장 27절에서 바울은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여 침례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 입었느니라고 했다. 만약 우리가 이 구절을 마태복음 28장 19절과 비교한다면, 우리는 삼일 하나님 안으로 침례받는 것이 그리스도안으로 침례 받는 것이라는 것을 볼 수 있다. 우리가 그 안으로 침례 받은 그리스도는 생명주는 영이고 생명 주는 영은 우리가 참여할 수 있는 과정을 거친 하나님이다. 우리 모두는 그러한 그리스도 안으로 침례 받았다.

내가 어렸을 때 나는 어떻게 내가 그리스도안으로 들어갈 수 있는지 발견하려고 노력했다. 성경은 내가 그리스도안으로 침례 받았고 내가 그리스도 안에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나는 또한 부활 후에 그리스도가 하늘로 승천했다고 배웠다. 그분은 거기 계셨고, 나는 여기 있었다. 내가 어떻게 그분 안에 있을 수 있는가? 이것은 성령을 통해서라고 했다. 그러나 그게 무슨 뜻인가? 그후 몇 년 동안 말씀을 공부하고 그리스도를 생명으로 체험한 후 우리는 답을 찾았다. 그렇다. 예수님은 하늘에 계시지만, 에베소서 1장 23절과 4장 10절이 말해주듯 오늘날 그리스도는 만유 안에서 만유를 채우신다. 부활하신 그리스도는 하늘과 이 땅을 채우신다. 그분은 어디에나 계시다. 지금 그분은 만유를 포함한 생명 주는 영이다(고후3:17). 그래서 우리는 반드시 그분 안으로 침례 받아야 한다. 이것이 침례가 형식이 아니라 실제인 이유이다. 우리가 다른 이들을 침례 줄 때, 우리는 반드시 우리의 믿음을 사용해 우리가 그들을 그리스도, 생명주는 영, 삼일 하나님 안으로 집어넣는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이름 “안으로”

마태복음 28장 19절에서, 주님은 모든 족속을 아버지. 아들, 성령의 이름으로 침례 주라고 말씀하신다. “안에(in)”라고 번역된 헬라어 전치사는 “안으로(into)"라고 번역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들을 아버지, 아들, 성령의 이름 안으로 침례 주어야 한다. 이것을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는 반드시 갈라디아서 3장 27절,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여 침례 받은자는 그리스도로 옷 입었느니라”를 또한 읽어야 한다. 이 두 구절로 우리는 아버지, 아들, 성령 안으로 침례 받는 것이 그리스도안으로 침례 받는 것과 같다는 것을 볼 수 있다. 아버지는 아들 안에 계시고, 아들은 부활로 생명 주는 영이 되셨다. 그러므로, 오늘날 만약 우리가 그 영을 만진다면, 우리는 아들을 만지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아들이 있을 때, 우리는 아버지가 있다. 이것이 삼일 하나님이다

(위트니스 리 , 흐름지, 영문판 p.1399-1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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