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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정을 거치고 완결되신 삼일 하나님
삼일 하나님에 대한 전통적인 이단들

위트니스 리를 인용

제 11 장
계시록에 계시된 삼일 하나님

I.삼일 하나님으로부터 나온 은혜와 평강

계시록 1장:
4절 요한은 아시아에 있는 일곱 교회에 편지하노니 이제도 계시고 전에도 계시고 장차 오실이와 그 보좌 앞에 일곱 영과

5절 또 충성된 증인으로 죽은 자들 가운데서 먼저 나시고 땅의 임금들의 머리가 되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기를 원하노라 우리를 사랑하사 그의 피로 우리 죄에서 우리를 해방하시고

계시록 1장 4절과 5절은 “이제도 계시고 전에도 계셨고 장차 오실 분과 그의 보좌 앞에 있는 일곱 영과 또 충성된 증인이시며 죽은 자들 가운데서 먼저 나신 자시며 땅의 왕들의 주권자가 되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기를 원하노라”고 말한다. “이제도 계시고 전에도 계셨고 장차 오실 분”은 영원한 아버지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의 보좌 앞에 있는 “일곱영”은 하나님의 운행하는 영 곧 그 영 하나님이시다. 하나님께 대하여는 “충성된 증인”이시오 교회에 대하여는 “죽은 자들 가운데 먼저 나신 분”이며 세상에 대하여는 “땅의 왕들의 주권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아들 하나님이시다. 이것이 삼일 하나님이시다. 영원한 아버지 하나님으로서 그분은 과거에 계셨고 현재에도 계시며 미래에 오실 분이다. 그 영 하나님으로서 그분은 하나님의 운행을 위한 칠 배의 강화된 영이시다. 아들 하나님으로서 그분은 하나님의 “증인”곧 증거요 표현이시며, 새 창조인 교회를 위해 “죽은 자들 가운데서 먼저 나신 분”이시며, 세상을 위해 “땅의 왕들의 주권자”이시다. 그러한 삼일 하나님으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교회들 안으로 주어진다.

(위트니스 리, 계시록 라이프 스터디, 영문판 p.37-38)

이미 보았듯이 우리의 하나님은 삼일이시다. 그분이 삼일이심은 그분이 아버지, 아들, 영이심을 뜻한다. 우리가 삼일 하나님을 철저히 이해하기란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거룩한 삼일성은 우리의 지적 능력을 훨씬 초월하기 때문이다. 당신의 지적 능력(생각)을 너무 많이 사용하지 말라. 그보다 아버지, 아들, 영이신 삼일 하나님을 깨닫고 체험할 수 있도록 당신의 영을 사용하라.

아버지

먼저는 바로 그 전능하신 하나님이 아버지이시다. 아버지는 다름 아닌 하나님 자신이다. 그분이 아버지 되심은 그분이 근원이심을 의미한다. 아버지는 또한 주이시며, 1장 4절이 밝혀 주듯이 그분은 지금도 계시고 전에도 계셨고 장차 오실 분이다.

계시록에서 삼일 하나님의 순서는 마태복음과 다르다. 마태복음 28장 19절에서 삼일 하나님의 순서는 아버지, 아들, 성령의 순이다. 그러나 1장 4절과 5절에서는 그 순서가 바뀌어 있다. 하나님의 일곱 영이 세 번째 대신 두 번째 자리에 놓여있다. 이것은 하나님의 칠배의 영의 강화된 기능이 중요함을 계시한다. 이런 요점은 2장 7절, 11절, 17절, 29절, 3장 6절, 13절, 22절, 14장 13절, 22장 17절 등에 있는 그 영의 말씀하심에 대한 반복된 강조에 의해 확증된다. 서신서들의 서두에서는 오직 아버지와 아들만 언급되며, 그분들로 말미암아 은혜와 평강이 수신자들에게 주어진다. 그러나 여기에서는 그 영도 포함되며, 그분으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교회들에게 전해진다. 또한 이것은 교회의 타락에 대항하기 위한 하나님의 움직이심을 위해서는 그 영이 절대적으로 필요함을 상징하기도 한다.

(위트니스 리, 계시록 라이프 스터디, 영문판 p.39-40)

하나님의 일곱 영들

1장 4절에 있는 그 영은 하나님의 강화된 영이기 때문에, 그분은 일곱 영들이라고 불리 운다. 일곱 영들은 4절과 5절에서 삼일 하나님 가운데 자리하고 계시기 때문에 의심할 바 없이 하나님의 영이다. 우리는 자신의 천연적이고 제한된 지능으로 성경을 이해할 수 없다. 우리 관념에 따르면 “일곱 영들”이란 말은 일곱 개의 개별적인 영들을 가리킨다. 그러나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그러한 것이 아니다. 여기서 일곱이란 수는 일곱 개의 다른 영들이 아니라 하나의 칠 배의 영을 언급한다.

일곱이란 하나님의 경륜적인 움직임에 있어서 완성(완전)의 수인 한편 열 둘은 하나님의 영원한 행정에서의 완성의 수이다. 예를 들어, 하나님은 지구를 육 일에 안식일 하루를 더하여 창조하셨다. 더욱이 성경에는 일곱 시대(경륜)가 있다. 오늘날 하나님의 움직이심을 위해 교회는 칠이란 숫자를 갖고 있다. 계시록에서 일곱 인들, 일곱 나팔들, 일곱 대접들은 모두 하나님의 경륜적인 움직이심을 위해 있다. 이처럼 칠 배의 영은 오늘날 하나님의 움직이심에 있어서 강화된 영이다. 그분은 하나님의 움직이심을 위한 하나님의 일곱 영들이다.

일곱이 하나님의 역사에 있어서 완성의 수이듯이, 일곱 영들은 땅위에서의 하나님의 움직이심을 위한 것이다. 실체와 존재에 있어서 하나님의 영은 하나이며, 강화된 기능과 하나님이 운행하시는 역사에 있어서 하나님의 영은 칠 배이다. 그것은 마치 스가랴 4장 2절에 있는 등대와도 같다. 존재상 그것은 하나의 등대이지만, 기능상 그것은 일곱 등이다. 계시록이 쓰여질 당시 교회는 타락했으며 시대는 암흑기였다. 그러므로 땅 위에서의 하나님의 움직이심과 역사를 위해 칠 배로 강화된 하나님의 영이 필요했다. 우리 모두는 연속적인 조명도로 켤 수 있는 삼원 방식의 전구를 잘 알고 있다. 그리 많은 빛이 필요치 않을 때 우리는 일도로 전구를 켜지만, 더 밝은 조명이 필요한 경우에는 이도나 삼도로 켠다. 마찬가지로 등대 위에 있는 일곱 등들은 칠 배의 강화된 빛이었다. 사복음서에서 하나님의 영은 단순했었다. 왜냐하면 그 당시에는 그렇게 많은 빛이 필요치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교회가 타락되고 시대가 극히 어둡게 된 후에는 성령이 칠 배로 강화될 필요가 있었다. 이런 식으로 하나님의 영은 칠 배의 영이 되었다. 존재에 있어서 성령은 스가랴서에 있는 등대같이 하나이다. 그러나 기능상 성령은 일곱이다.

(위트니스 리, 계시록 라이프 스터디, 영문판 p.40-41)

아들
(1)충성된 증인

아들은 충성된 증인이시다(1:5, 3:14). 그분은 하나님의 증인이시다. 비록 그분이 하나님이시지만, 또한 그분은 하나님의 증인이시기도 하다. 그분이 없으면 우리는 하나님을 알 수 없고 볼 수도 없고 얻을 수도 없다. 하나님은 그분에 의해 증거를 받으신다.

(2)죽은 자들 가운데서 먼저 나신 분

아들은 죽은 자들 가운데서 먼저 나신 분이다(1:5). 우주 안에서 그분은 두 가지 창조-그분의 첫 번째 역사에 의한 창조와 두 번째 역사에 의한 창조-를 가지셨다. 우리는 모두 하나님의 첫 번째 창조를 알고 있다. 그러나 우리 중 많은 이들이 그분의 두 번째 창조는 잘 알지 못한다. 하나님의 두 번째 역사는 부활이다. 먼저 하나님은 존재하는 모든 것들을 창조하셨고, 두 번째로 그분은 그러한 존재물들 중 어떤 것들을 부활시켜 그것들을 다른 범위인 다른 영역, 즉 부활의 영역 안으로 들어가게 하셨다. 우리는 하나님의 첫 번째 창조 안에 있는가, 아니면 그분의 두 번째 창조 안에 있는가? 우리 몸은 하나님의 첫 번째 창조 안에 남아 있는 반면에 우리 영은 그분의 두 번째 창조 안에 있다. 우리 영은 거듭났다. 이는 우리 영이 재창조되었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하나님의 둘째 창조 안에 속해 있다.
하나님의 창조 둘 모두에서 그리스도는 첫째(으뜸)이시다. 골로새서 1장 15절은 그리스도가 모든 창조물 중에서 먼저 나신 분이라고 말하며, 계시록 1장 5절에서 우리는 그분이 죽은 자들 가운데서 먼저 나신 분이라는 말을 듣는다. 그분은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하신 첫 번째 분이시다. 우리는 그분을 따르게 될 것이다. 여기에서 “죽은 자들 가운데서 먼저 나신 분”이라는 구는 부활 안에 있는 하나님의 창조를 가리킨다. 이것은 새로운 시작을 상징한다. 하나님의 첫 번째 창조 안에 하나의 시작이 있었고 부활 안에 있는 하나님의 두 번째 창조 안에도 또 다른 시작이 있었다. 우리가 거듭났을 때 우리는 하나님의 두 번째 창조 안에서 새로운 시작을 체험했다.

(3)땅의 왕들의 주권자

아들은 땅의 왕들의 주권자이시다(1:5). 비록 공산주의자들이 그리스도를 적대하지만, 그들은 자신들이 그렇게 하고 있음을 깨닫지도 못한 채 그분의 달력을 사용하고 있다. 역사에 따르면, 당신이 사용하는 달력을 창시한 사람이 바로 당신이 복종하고 있는 사람이다. 만일 누가 어떤 왕의 달력을 사용한다면, 그는 그 왕의 통치 아래 있어야 할 것이다. 마찬가지로 공산주의자들은 그분의 달력을 사용하고 있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 아래 있다. 그들은 그것을 국제 달력이라고 부르지만, 실상 그것은 그리스도의 달력이다. 이런 식으로 그들은 그분이 그들의 주권자이심을 무의식적으로 인정하고 있다. 우주 안에는 유일한 주권자 한 분이 계신다. 오늘날 모든 인류는 그리스도의 달력을 쓰고 있고, 그분의 통치 아래 있다. 땅 위에 있는 모든 백성들은 그분의 백성들이며, 그분은 모든 열국 들의 주권자이시다. 예수님은 공산주의자들에게 이렇게 말씀 하실지도 모른다. “너희는 나를 적대하고 있다. 그러나 나는 너희들을 나의 백성이 되게 할 것이다. 나는 너희가 나의 달력을 쓰도록 하겠으며, 너희는 나의 통치 아래 있는 것에 대해 선택의 여지가 없을 것이다. 나는 땅의 유일한 주권자이다.”

(위트니스 리, 계시록 라이프 스터디, 영문판 p.44-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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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I. 말씀하시는 영

계시록 2장:
8절 서머나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처음이요 나중이요 죽었다가 살아나신 이가 가라사대
11절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이기는 자는 둘째 사망의 해를 받지 아니하리라
18절 두아디라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그눈이 불꽃 같고 그 발이 빛난 주석과 같은 하나님의 아들이 가라사대
29절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2장 7절 전반부는 “귀 있는 자는 그 영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라고 말한다. 2장과 3장에 있는 일곱 서신의 각 서두에서 말씀하시는 분은 주님이시다(2:1, 8, 12, 18, 3:1, 7, 14). 그러나 일곱 서신 모두의 끝에서 교회들에게 말씀하시는 분은 그 영이시다(2:7, 11, 17, 29, 3:6, 13, 22). 또 다시 이것은 말씀하시는 그리스도가 그 영이심을 입증한다. 그리스도가 말씀하시는 것마다 그것은 그 영의 말씀하심이다. 아무도 이것에 대해 반론을 제기할 수 없다. 에베소 교회에 말씀하고 계셨던 분은 누구인가? 오른손에 사자들을 붙드시고 교회들 한 가운데서 걷고 계시는 그리스도 곧 인자이시다. 7절이 가리키듯이 말씀하시는 이는 결국 그 영이시다. 이것은 그리스도가 말씀하시는 영이심을 입증한다. 이것은 그 영이 주이시고 주가 그 영이심을 지적할 뿐 만 아니라 또한 1장 4절에서 칠 배로 강화된 영에 의해 지적되듯이 교회가 타락한 어둠 속에서 그 영이 지극히 중요함을 강조하기도 한다. 그 동일한 강조점이 14장 13절과 22장 17절에서도 발견된다. 오늘날 그리스도가 말씀하시는 영이 아니라고 말하는 것은 어리석은 것이며 말씀하시는 영과 그리스도를 분리하는 것도 우스운 일이다. 그 둘은 하나이다

만일 말씀하는 분은 오직 그리스도이며 말씀하시는 영은 없다고 한다면 그분은 결코 몇 가지 말씀을 우리 영 안으로 말씀하실 수 없을 것이며 또한 그분의 말씀하심은 그리 주관적이거나 감동적이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체험이 증거하는 바와 같이 만일 우리가 이 서신들을 읽을 때 우리 영 안에서 그분께 열려 있다면 그 영은 즉시로 그리스도에 관한 그 무엇을 우리 안으로 말씀하실 것이다. 말씀하는 분은 객관적인 그리스도가 아닌 주관적인 영이시기 때문에 그분은 성경의 검고 흰 글자로 말씀하실 뿐 아니라 우리 영 안에서도 말씀하신다. 일단 우리가 그분의 말씀하심을 들으면 지울 수 없는 그 무엇이 우리 안으로 역사되어 아무 것도 그것을 제거할 수 없게 된다. 오늘날 우리의 그리스도는 말씀하시는 영이시다. 나는 이 사실을 기뻐하며 또 그것을 담대하게 선포한다.

(위트니스 리, 계시록 라이프 스터디, 영문판 p.121-122)

듣기 위해서는 합당한 귀가 요구됨

영적인 일에서 보는 것은 듣는 것에 달려 있다. 이 책의 저자는 먼저 음성을 들었고(1:10) 그런 다음 이상을 보았다(1:12). 만일 우리 귀가 막혀서 들을 수 없다면 우리는 볼 수 없다(사6:9-10). 유대인들은 주의 말씀을 듣지 않으려고 했다. 그래서 그들은 주님이 하시는 것을 볼 수 없었다(마13:15, 행28:27). 주님은 우리가 그분의 경륜에 따라 어떤 것들을 볼 수 있도록 우리의 귀를 열어서 그분의 음성을 듣게 하시기를 항상 원하신다(욥33:14-16, 사50:4-5, 출21:6). 막힌 귀는 할례 받아야 한다(렘6:10, 행7:51). 죄인의 귀는 구속하는 피로 깨끗케 되고 그 영으로 기름 발라져야 한다(레14:14, 17, 28). 이 책에서 그 영이 교회들에게 말씀 하실 때 우리 모두에게는 그 영의 말씀하심을 들을 수 있는, 열려 있고 할례 받고 정결케 되고 기름 발라진 귀가 필요하다.

설사 우리의 각도와 위치가 올바르다 해도 여전히 듣기 위한 합당한 귀를 갖지 않을 수 있다. 1장은 보는 것을 강조하고 2장 3장은 듣는 것을 강조한다. 우리는 보고 듣는 것이 모두 필요하다. 우리의 신체 감각 중에서 어느 것이 보다 중요한가? 보는 것인가 아니면 듣는 것인가? 가령 당신이 시력이나 청력을 상실하는 것 중에 선택권이 있다 하자. 당신은 무엇을 택하겠는가? 우리는 보는 것이 듣는 것보다 더 중요하다고 말할지 모른다. 그러나 듣는 것이 보는 것보다 더 깊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께 “주여, 저는 보고 듣는 것 둘 다 필요합니다. 제게 긍휼을 베푸소서, 주여, 제게 볼 수 있는 눈과 들을 수 있는 귀를 허락하소서”라고 말해야 한다. 우리는 반드시 보고 들을 수 있어야 한다고 그분께 말씀드리면서 주님과 씨름해야 할 것이다.

듣는 것은 보는 것보다 더 친근하다. 우리의 가장 가까운 친구들은 우리에게 친근히 말할 것이다. 만일 당신이 청각 기관을 상실한다면 당신의 사랑하는 자와 함께 이 친근함을 누릴 수 없으리라. 1장에서 요한은 보았고 2장 3장에서 그는 들었다. 우리는 교회생활을 보아야 하고 또한 교회생활의 친근한 내용들을 들어야 한다. 교회를 보는 것과 교회 생활의 친근한 내용들을 듣는 것은 각각 별개이다. 비록 우리 중 많은 이들이 교회를 보았지만 교회 생활의 친근한 내용들은 들어 보지 못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는 듣는 귀가 필요하다. “귀 있는 자는 그 영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위트니스 리, 계시록 라이프 스터디, 영문판 p.123-124)

성령으로서 아들이 교회들에게 말씀하심

언제든지 아들이 말씀하실 때, 그는 성령이시다. 말씀하시는 아들은 곧 성령이다. 하나님의 아들은 말씀이다. 말씀이 나오면 그 말씀이 성령이 된다. 이것은 계시록 2장과 3장에 있는 일곱 서신에서 증명되었다. 각 서신의 첫머리에는 주께서 말씀하신다고 했지만 끝에서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어야 한다고 말한다. 이것은 말씀하시는 주님이 곧 말씀하시는 성령이심을 증거한다. 언제나 아들이 말씀하실 때, 그는 말씀하시는 성령이시다. 계시록 2장과 3장에 있는 일곱가지 비교 가운데에서 우리는 아들이 말씀하신 것은 모두 성령이 말씀하신 것임을 알 수 있다(계2:1, 7, 2:8, 11, 2:12, 17, 2:18, 29, 3:1, 6, 3:7, 13, 2:14, 22).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이신 아들을 가지고 있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이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하심이다. 언제든지 아들이 말씀하실 때, 그는 말씀하시는 성령이다.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이 영이요 생명이다”(요6:63)

(위트니스 리, 히브리서 라이프 스터디, 영문판 p.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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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II. 새 예루살렘 안에 삼일 하나님

신성한 삼일성-새 예루살렘의 기본 구조

신성한 삼일성이 새 예루살렘의 기본 구조이다. 그것은 금으로 상징되는 하나님이 본성으로 지어졌다. 본래 그 성은 금의 산이며, 그 길은 또한 금이다(계21:18b. 21b). 이것은 그 성이 신성한 것임을 가리킨다. 신성이 그 건축의 내용의 기본적인 요소이다. 죽음과 부활을 통한 아들의 구속은 진주로 상징된다. 진주는 굴에서부터 나온다. 그것은 굴이 모래 알맹이에 의해 상처를 입은 후 산출된다. 굴은 모래 주위에 그 생명의 즙을 분비하여 그것을 진주로 만든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성육신을 상징하고, 그분이 굴처럼 죽음의 물을 통과한 것을 상징한다. 그분이 우리의 범죄를 인하여 상처를 입고 그분의 부활의 생명을 해방함으로써 진주를 산출한다.

그 영의 변화는 보석에 의해 상징된다. 금에는 하나님의 본성이 있고, 진주에는 죽음과 부활을 통한 아들의 구속이 있으며, 보석에는 변화의 역사를 하는 그 영이 있다. 이것은 삼일 하나님 자신이 새 예루살렘의 기본 구조임을 뜻한다. 삼일성은 새 예루살렘의 축소판인 교회생활의 기본 구조도 된다. 그 규모는 훨씬 작으나 그 요소들은 같다.

(위트니스 리, 성경의 기본 계시, 영문판 p.1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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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우리의 문이신 삼일 하나님

계시록 21장
12절 크고 높은 성곽이 있고 열 두 문이 있는데 문에 열 두 천사가 있고 그 문들 위에 이름을 썻으니 이스라엘 자손 열 두 지파의 이름 들이라
13절 동편에 세 문, 북편에 세 문, 남편에 세 문, 서편에 세 문이니
21절 그 열두 문은 열두 진주니 문마다 한 진주요 성의 길은 맑은 유리 같은 정금이더라
25절 성문들을 낮에 도무지 닫지 아니하리니 거기는 밤이 없음이라

그 성의 문들

이제 우리는 새 예루살렘의 문들에 온 주의를 기울이기로 하자. 문들의 의미는 기초석들의 의미만큼이나 심오하다. 이 열 두 문의 의미를 이해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1)사면에 각각 세 문이 있음

계시록 21장 13절은, 새 예루살렘에는 동편에 세 문, 북편에 세 문, 남편에 세 문, 서편에 세 문이 있음을 계시한다. 이처럼 그 성은 그 사면에 각각 세 문들을 가지고 있는 정사각형으로 되어 있다(16절). 정면인 동편은 일출의 영광을 향하고 있고 첫 번째로 분류되며, 꼭대기에 있는 북편은 두 번째로, 밑에 있는 남편은 세 번째로 분류되고, 후미인 서편은 네 번째로 분류된다. 그 사면에 있는 문들은 땅의 네 방향을 향하고 있는데, 이는 땅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거룩한 성에 들어갈 수 있음을 상징한다.(창2:10-14에 있는 강의 네 근원과 비교하라).

(위트니스 리, 계시록 라이프 스터디, 영문판 p.720-721)

(2)모든 사람들에게 유용한 삼일 하나님

각면에 있는 세 문들은 삼일 하나님-아버지와 아들과 영-이 사람들을 거룩한 성 안으로 인도하기 위해 함께 일하시는 것을 상징한다. 이것은 누가복음 15장에 있는 세 비유에서 지적되었고 마태복음 28장 19절에 있는 주님의 말씀 안에 암시되어 있다. 누가복음 15장에 있는 세 비유는 목자와 잃은 양, 여인과 잃어버린 동전, 아버지와 돌아온 탕자에 관한 것이다. 목자는 아들을 가리키고, 아버지는 물론 아버지를 가리키며, 여인은 그 영을 상징한다. 한 죄인이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오기 위해서는 잃어버린 양을 다시 찾는 목자인 아들이 필요하고, 사람들이 회개하도록 그들의 마음을 비추시는 그영이 필요하며, 돌아오고 회개한 탕자를 받아들이는 아버지가 필요하다. 그러므로 삼일 하나님은 새 예루살렘 안으로 들어가는 입구이다.

삼일 하나님이 사람들을 거룩한 성 안으로 이끌기 위해 일하고 계신다는 사실은 마태복음 28장 19절에 있는 주님의 말씀에도 암시되어 있다. 아버지와 아들과 그 영 안으로 침례 받는 것은 거룩한 성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이같이 아버지와 아들과 그 영은 그 성의 각 면에 있는 세 문들이다. 그 세 문들은 각각 세 면에 있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사면의 각면에 중첩해 있다. 어느 한 면에 있는 문들은 다른 세 면에 있는 문들과 정확히 동일하다. 이것은 삼일 하나님이 땅의 모든 사방에 있는 사람들에게 유용함을 가리킨다.

세 문들은 삼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도달하시어 우리를 그분의 영원한 경륜 안으로 인도하기 위해 오셨음을 말한다. 신격 안의 세 분, 즉 아버지와 아들과 그 영은 하나님의 경륜 안에서 우리에게 도달하시어 우리를 그분의 경륜으로 되돌리시기 위해 나오셨다. 신약의 많은 구절들이 삼일 하나님에 대해 말한다. 예를 들어, 에베소서 3장 14절부터 17절까지에서 바울은 “내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앞에 무릎을 꿇고 비노니 그 영광의 풍성을 따라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그의 집을 만들게 하옵시고”라고 말했다. 이 구절들에서 우리는 아버지와 그 영과 아들이신 그리스도를 본다. 고린도후서 13장 13절도 역시 삼일 하나님을 보여 주고 있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이 너희 무리와 함께 있을지어다”. 이 구절에서 신격의 세 분은 그분을 분배하기 위한 것이요, 그분의 나가고 들어오심, 즉 그분의 밖으로 퍼지심과 우리의 안으로 들어감을 위한 것이다.

(위트니스 리, 계시록 라이프 스터디, 영문판 p.721-722)

성의 문들

성에는 동서남북 모든 방향을 망라하는 네 방향에 각각 세 문들이 있다(계21:12-13). 숫자 4는 항상 창조와 혹은 피조물을 나타낸다. 계시록 4장은 네 생물을 계시하는데 이것은 모든 생물을 대표한다. 숫자 3은 신격의 세 인격을 상징한다. 이것은 신격의 세 인격이 땅의 모든 네 방향으로부터 온 모든 사람들을 위한 입구라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가 어디에 있든지 신격의 세 인격은 우리에게 도달할 수 있으시다.

누가복음 15장은 세 비유를 기록하고 있는데 잃어버린 양을 찾는 목자, 잃어버린 동전을 찾는 여인, 그리고 방탕한 아들을 기다리는 아버지의 비유가 그것이다. 주 예수는 우리를 찾아 구속하기 위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시려고 목자로 오셨다. 그리스도의 역사 후에 성령이 우리를 되돌려오기 위해 우리 마음 안에서 찾으며 비추시는 여인으로 오셨다. 성령의 찾는 역사로 말미암아 우리는 회개하고 기쁘게 받으시는 아버지께로 돌아온다. 그때 우리는 문으로 들어왔다. 신격의 세 인격이 바로 우리를 건축 안으로 이끄셨다. 그분들은 땅의 네 모퉁이로부터 온 누구에게나 입구이시다. 이것은 삼일 하나님의 누림 즉 하나님의 사랑, 그리스도의 은혜, 성령의 교통 안으로 들어가기 위한 고린도 후서 13장 13절에 있는 말씀과 일치한다.

(위트니스 리, 하나님의 건축의 이상, 영문판 p.200-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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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 우리의 존재이신 삼일 하나님

계시록 22장:
1절 또 저가 수정같이 맑은 생명수의 강을 내게 보이니 하나님과 및 어린양의 보좌로부터 나서

하나님과 어린 양의 보좌

계시록 22장 1절은 “또 그가 수정같이 맑은 생명수의 강을 내게 보이니 하나님과 및 어린양의 보좌로부터 나서 길 가운데로 흐르더라”고 말한다. 하나님과 어린양의 보좌, 즉 하나님과 어린양 두 분을 위한 하나의 보좌는 하나님과 어린양이 하나-“어린양-하나님”, “구속하시는 하나님”, “하나님 구속주”-이심을 입증한다. 영원 안에서 보좌 위에 앉아 계신 바로 그 하나님이 우리의 구속하시는 하나님이시며, 그 보좌로부터 우리의 공급과 만족을 위해 생명수의 강이 흘러나온다. 이것은 어떻게 삼일 하나님-하나님과 어린양과 생명수로 상징된 그 영-이 영원토록 그분 자신을 그분의 머리되심(보좌의 권위에서 암시됨)아래서 그분의 구속받은 이들 안으로 분배하는지를 묘사하고 있다.

두 개의 보좌-하나는 하나님을 위하고 다른 하나는 어린양을 위한-가 없음을 주목하라. 기독교 안에서 사용되는 전통적인 용어들에 따르면, 하나님과 어린양을 언급하는 것은 별개의 두 인격인 하나님과 어린양이 하나의 보좌 위에 앉아 있다는 뜻이다. 어찌 하나님과 어린양이 하나의 보좌 위에 앉아 계실 수 있겠는가? 그분들은 나란히 앉아 계신가? 21장 23절에서 우리는 이 질문들에 대한 올바른 답의 실마리를 찾아 볼 수 있다. 이 구절에서 하나님은 빛에 비유되고 어린양은 등에 비유된다. 빛과 등은 분리될 수 없으며, 나란히 서 있을 수도 없다. 오히려 빛은 등 속에서부터 밖으로 비추어 나온다. 그러므로 빛이신 하나님은 등이신 어린양 안에 계신다. 하나님과 어린양은 나란히 앉아 계시는 것이 아니라 바로 하나님 자신이 등이신 어린양 속에 계시면서 그분을 통해 비춰 나오는 것이다.

나는 우리를 반대하기 위해 전통적인 삼일성의 가르침을 사용하는 사람들이 하나님과 어린양이 같은 보좌 위에 계신 것을 어떻게 설명 하는지 보고 싶다. “인격”이란 용어를 사용하지 않는 것이 더 좋다. 왜냐하면 그것을 사용함으로써 우리는 복잡하게 얽히게 되고 또한 순수한 말씀에 따라 성경을 철저하게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다. 성경은 하나님이 빛이시고 어린양이 그 등이심을 계시해 준다. 결국 빛이 등 안에 있기 때문에 이들은 두 가지 실체가 아니다. 즉 그분들은 두 면을 가진 하나의 실체이다. 인간의 언어로 삼일성을 설명하기란 심히 어렵다. 왜냐하면 우리에게는 그것을 적절하게 표현해 낼 만한 어휘와 용어가 전연 없기 때문이다. 비록 우리가 합당한 어휘들을 갖고 있지 않지만 우리는 빛이신 하나님과 등이신 그리스도 곧 어린양에 대한 그림을 갖고 있다. 둘 모두 하나의 보좌 위에 앉아 계시다는 사실은 그분들이 둘이 아니요 하나라는 것을 가리킨다.

보좌에 계신 분은 창조하신 하나님인 동시에 구속하신 어린양이시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분을 “어린양-하나님”이라고 부를 수 있다. 이것은 그분이 구속하시는 하나님이라는 뜻이다. 이 구속하시는 하나님은 그분의 행정(통치)의 보좌 위에 계시는데, 이는 그분이 자신을 그분의 모든 구속받은 자들 안으로 분배하시기 위함이다.

(위트니스 리, 계시록 라이프 스터디, 영문판 p.740-741)

(1)정금 산의 정상에 있음

새 예루살렘에 있는 보좌는 정금 산의 정상에 있다. 이 성 안에 있는 하나의 길은 결국 그 보좌로 인도한다. 주 예수님께서는 그분의 보좌로부터 땅으로 내려오셨는데, 이는 그분이 하나님을 사람 안으로 이끌기 위함이었다. 이것은 그분 자신으로부터 나와서 인류에게 도달하시는 삼일 하나님이다. 우리가 그분을 우리 자신 안으로 영접했을 때, 우리는 그분 안으로 침례 받은 것이다. 침례란 실제로 삼일 하나님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고(마28:19, 헬라어), 삼일 하나님 안으로 들어가는 것은 새 예루살렘 안으로 처음 들어가는 것이다. 진주문을 통과한 직후에 우리는 하나님의 보좌에 이르도록 우리를 위로 인도하는 정금 길 위에 우리 자신이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2)생명 공급의 유일한 근원임

새 예루살렘의 중심에 있는 하나님의 보좌는 생명 공급의 유일한 근원이다. 하나님이 그분 자신을 생명으로, 생명 공급으로, 그리고 영원하고 절대적이고 모든 것을 포함한 은혜로서 우리 안으로 분배하시는 것은 바로 그분의 행정에 의해서이다. 그분이 자신을 우리 안으로 분배하시는 것은 그분의 행정에 의한 것이다. 이 때문에 오늘날 교회 생활 안에는 신성한 권위와 교회의 통치가 있는 것이다. 오늘날 교회 생활 안에는 신성한 통치가 있는데, 이 통치는 하나님의 보좌로부터 나온다. 교회 안에 있는 신성한 권위는 하나님께서 자기 자신을 생명으로, 생명공급으로, 모든 것을 충족시키는 은혜로 우리 안으로 분배하시기 위한 것이다. 오직 우리 자신을 하나님의 권위 곧 하나님의 통치에 복종시킬 때만이 우리는 능히 그분의 모든 것을 충족시키는 은혜에 참여할 수 있다.

(위트니스 리, 계시록 라이프 스터디, 영문판 p.741-742)

생명수의 강

이제 우리는 보좌 위에 앉아 계신 구속하시는 하나님께서 어떻게 그분 자신을 그분의 모든 구속받은 자들 안으로 분배하시는지 고찰해 보아야 한다. 하나님은 보좌로부터 흘러나오는 강을 수단으로 하여 그분 자신을 우리 안으로 분배하신다. 1절에 따르면, 이 강은 “생명수의 강” 이라고 불리운다. 창세기 2장 10절부터 14절, 시편 46편 4절, 에스겔 47장 5절부터 9절에까지에 있는 강들로 예표된 그 강은 그 흐름 안에 있는 생명의 넘침을 상징한다. 그것은 창세기 2장 10절부터 14절까지에 있는 하나의 강의 네 근원처럼 거룩한 성의 네 방향을 통과하면서 흐르는 하나의 강이다. 그 풍성을 지닌 이 하나의 강이, 요한 복음 7장 38절에서 지적하듯이 우리의 체험 안에서 많은 강들이 된다.

생명수는 하나님의 구속된 사람들의 생명과 생명 공급이 되기 위해 그분 자신을 그 영으로서 그들 안으로 흘러가게 하는 그리스도 안에 계신 하나님을 상징하는 것이다. 그것은 갈라진 반석에서 나온 물로 예표되며(출17:6, 민20:11), 창에 찔린 주 예수님의 옆구리에서 흘러나온 물로 상징된다(요19:34). 여기에서 이 생명수는 새 예루살렘 전체를 공급하고 흠뻑 적시기 위해 하나님과 어린양의 보좌로부터 흐르는 강이 된다. 이와 같이 그 성은 신성한 생명으로 충만되어 하나님을 그분의 생명의 영광 안에서 표현한다.

우리는 이 강을 더 자세히 볼 필요가 있다. 창세기 2장 10절은 “강이 에덴에서 발원하여 동산을 적시고 거기서부터 갈라져 네 근원이 되었으니”라고 말한다. 이 구절에 따르면, 하나의 강이 마침내 땅의 사방에 이르는 네 근원이 되었다. 구약에는 이 강을 언급하는 다른 많은 구절들이 있다. 시편 46편 4절은 “한 시내 (강)가 있어 나뉘어 흘러 하나님의 성을 기쁘게 하도다”라고 말한다. 에스겔 47장에서는 집의 문지방 아래에서 흘러나오는 물이 “헤엄할 물이요 사람이 능히 건너지 못할 강이 된지라”(5절)고 말하며, 같은 장 9절은 또한 “이 강이 이르는 각처에 모든 것이 살 것이며”라고 말한다.

(위트니스 리, 계시록 라이프 스터디, 영문판 p.742-743)

이 강은 또한 신약에서도 언급된다. 이스라엘 자손과 그들이 광야에서 방황하는 것에 대해 말하면서, 고린도 전서 10장 4절은 “다 같은 신령한 음료를 마셨으니 이는 저희를 따르는 신령한 반석으로부터 마셨으매 그 반석은 곧 그리스도시라”고 말한다. 이스라엘 자손들이 목마름으로 인해 불평하고 있을 때 하나님은 모세에게, 반석을 쳐서 거기에서 나오는 물을 사람들로 하여금 마시게 하라고 말씀하셨다(출17:1-6). 모세는 그렇게 했으며 주님은 “또 반석에서 시내를 내사 물이 강같이 흐르게”하셨다(시78:16). 매맞은 반석에서 나온 물은 생명 주는 영의 예표였다. 주 예수님은 요한복음에서 이 영에 대해 말씀하셨다. 요한복음 4장 10절에서는 사마리아 여인에게 자신이 생명수를 주는 분이라고 말씀하셨고, 14절에서는 “내가 주는 물을 먹는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나의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고 말씀하셨다. 더욱이 요한복음 7장 37절과 38절에서 주 예수님은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들이 흘러나리라”고 말씀하셨다. 여기서 우리는 그 하나의 강이 많은 강들이 됨을 본다. 생수의 강들은 하나님의 생명의 영인 유일한 생명수 강의 여러 다른 방면들의 많은 생명의 흐름들이다(롬15:30, 살전 1:6, 살후2:13, 갈5:22-23, 롬8:2를 보라). 이처럼 만일 우리가 22장 1절에 언급된 생명수 강의 의미를 이해하고자 한다면 반드시 우리는 성경 전체에 걸쳐서 이 강에 대한 문제의 기원과 그 발전을 추적해 보아야 한다.

이미 보았듯이 생명수의 강은 “어린양-하나님”의 보좌에서 나온다. 이 강은 다름 아닌 생명 주는 영이신 하나님의 흐르고 있는 영이다. 22장 1절에서 우리는 삼일 하나님-하나님과 어린양과 그 강-을 본다. 하나님 아버지는 근원이시고 어린양인 아들은 구속자 이시며 그 강은 그 영이시다. 그러므로 우리는 근원이신 아버지와 통로이신 아들과 흐름이신 그 영을 갖는다. 그러므로 22장 1절에서 우리는 삼일 하나님의 흐름을 볼 수 있다. 이것은 삼일 하나님께서 그분 자신을 우리 안으로 분배하시는 것에 대한 그림이다. 그분은 그분 자신에게서 나와 그분의 구속된 자들 안으로 흘러 들어가고 계신다. 이렇게 삼일 하나님을 우리 안으로 분배하는 것은 하나님의 통치하시는 보좌로부터 나온다. 이것은 하나님의 분배가 그분의 행정에 달려 있음을 뜻한다. 이것은 오늘날 교회 생활에서도 동일하다. 생명 공급과 하나님의 모든 것을 충족시키는 은혜의 분배는 하나님의 행정의 보좌에서 나온다. 결국 새 예루살렘에서 이 분배는 그 성의 모든 곳에 이를 것이며 온 성은 삼일 하나님으로 충만되고 흠뻑 적셔지고 두루 침투될 것이다. 이런 식으로 그 성은 하나님을 표현할 거시다.

(위트니스 리, 계시록 라이프 스터디, 영문판 p.743-7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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