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일 하나님 삼일 하나님
 
삼일 하나님 홈
신성한 삼일성 안에서 세 분의 관계
생명이시며 생명 주는 분이신 삼일 하나님
과정을 거치고 완결되신 삼일 하나님
삼일 하나님에 대한 전통적인 이단들

위트니스 리를 인용

제 9 장
서신서에 계시된 삼일 하나님 (1)

I. 로마서 8장-그분의 믿는이들 안에 계신 삼일 하나님

로마서 8장
9절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10절 또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시면 몸은 죄로 인하여 죽은 것이나 영은 의를 인하여 산 것이니라
11절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가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

로마서 8장 안에 삼일 하나님

우리가 언급하고 있는 영은 그 영이다. 즉 과정을 거치고 생명 주는 영이 되신 삼일 하나님이다. 제목에서처럼 이 삼일 하나님은 세 부분으로 된 사람을 적시신다. 로마서 8장 9절을 보라. 그러면 당신은 삼일 하나님을 언급한 것을 볼 것이다.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 그리스도, 그 영 모두가 여기에 언급되어 있음을 주목하라. 그러나 이 구절은 교리적인 말을 하고 있지 않다. 이것은 우리의 체험을 다루고 있다. 기독교가 삼일성에 관해 제시하고 있는 방식과 다르게 삼일성은 우리가 설명할 수 있는 교리가 아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체험하기 위해 삼일이 되신 하나님이 필요하다. 하나님, 그리스도, 그 영은 모두 우리의 체험 안에 있다.

(위트니스 리 , 생명 메시지, 영문판 p.2권, 164)

(1)삼일성에 대한 잘못된 관념

삼일성에 대한 전통적인 설명은 삼신론에 아주 가깝다. 하나님의 영이 우리와 연결될 때, 하나님이 뒤에 머무르시거나 그리스도는 보좌에 머물러 계시지 않는다. 이것은 기독교가 준 인상이다. 그들은 아버지를 한 인격으로 생각하며, 또 다른 인격인 아들을 보내어 구속을 성취하시고 그런 후 아들이 또다른 인격인 영을 보냈다고 생각한다. 전통적인 사상 가운데 아버지와 아들이 보좌에 계시는 동안 그 영이 믿는이들 안으로 들어왔다고 생각한다. 믿는이들이 기도할 때, 그들은 하나님 앞에 경배하고 아들의 이름으로 기도해야 한다고 가르침받았다. 신격을 이렇게 분리된 인격으로 나누는 것은 성경의 계시가 아니다...

(2) 하나 안에 있는 셋

요한복음 14장은 분명하게 아들이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가 아들 안에 있다고 말한다(10,11절). 아들을 보는 것이 아버지를 보는 것이다. 아들이 말할 때, 일하고 계시는 분은 아버지이다. 그 둘은 분리할 수 없다. 성경은 아들이 죽고 부활한 후 영이 되셨다고 말한다(고전 15:45하). 아버지인 아들은 영이 되셨다. 그러므로 삼일 하나님은 죄인 안에 들어올 수 있다. 영과 함께 아들이 왔고, 아들이 올 때, 아버지 또한 오신다.

삼일이라는 용어는 하나 안에 있는 셋을 의미한다. 한 면에서 셋이 있지만 다른 면에서 그들은 하나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분리될 수 없기 때문이다. 바울이 로마서 8장 9절과 10절에서 사용한 세 용어들을 주목하라. 그는 “하나님의 영”이 당신 안에 거한다고 말한다.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당신은 그분께 속하지 않았고, “그리스도”가 당신 안에 있다고 말한다. 왜 바울은 동일한 분을 언급하기 위해 세 가지 용어를 사용하는가? 그것은 이 분이 아버지, 아들, 그 영의 세 방면이 있기 때문이다.

(위트니스 리 , 생명메세지, 영문판 p.2권, 164-166)

서로 바꿔 사용할 수 있는 용어들

바울은 하나님, 하나님의 영, 그리스도의 영이란 용어를 서로 바꿔 쓸 수 있도록 사용한다. 그는 하나님으로 시작하여 하나님의 영으로 나아가고, 그 다음 계속 그리스도의 영으로 나아간다. 그러나 여기에서 멈추지 않고 10절에서 바울은 그리스도를 말하면서, 그리스도가 우리 안에 계신다고 한다. 겨우 몇 구절의 짧은 간격 안에서 신성한 명칭들-하나님, 하나님 영, 그리스도의 영, 그리스도-이 서로 바꿔 쓸 수 있도록 사용되었다. 이 네 가지 용어들은 하나의 존재 곧 삼일 하나님 자신을 나타낸다.

하나님의 영은 하나님 자신이다. 그 영이 하나님과는 다른 그 무엇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 명칭을 해석하지 말라. 신약 안에서 하나님의 사랑과 하나님의 은혜 같은 그러한 문구들은 사랑과 생명이 하나님 자신임을 의미한다. 같은 원리로 하나님의 영이란 용어는 그 영이 하나님임을 의미한다. 그리스도의 영에 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이 명칭은 단순히 그 영이 그리스도라는 것을 의미한다. 문맥에 따르면 그리스도의 영은 하나님의 영이다.

그리스도의 영에서부터 바울은 계속 그리스도로 나아간다. 이처럼 바울은 우리를 하나님의 영과 그리스도의 영을 통하여 하나님으로부터 그리스도께로 데려간다. 바울의 사상은 하나님에서 하나님의 영으로, 하나님의 영에서 그리스도의 영으로, 그리스도의 영에서 그리스도로 나아간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 하나님의 영, 그리스도의 영, 그리스도를 가졌다. 그러나 이 네 용어들은 모두 유일하신 삼일 하나님을 언급한다.

(위트니스 리 , 로마서 라이프 스터디, 영문판 p.628-629)

우리 안에 계신 그리스도

10절은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계신다고 말한다. 전치사“안에”는 매우 주목할 만하다. 그리스도 곧 놀라운 분이 실제로 우리 안에 계신다! 그리스도가 우리 안에 계시기 위해서 하나님은 반드시 하나님의 영이셔야 하고, 하나님의 영은 반드시 그리스도의 영이어야 하고, 그리스도의 영은 반드시 그리스도이어야 한다. 만일 하나님이 단지 하나님 자신으로만 계신다면 그분은 우리 속으로 들어오실 수 없다. 여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 먼저 하나님은 신성하고 무한하며 전능하시다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사람이므로 하나님은 사람의 중재 없이는 우리 속으로 오실 수 없다. 두 번째로 우리는 죄가 가득하고 더럽다. 타락 때문에 우리 존재의 각 부분이 더럽혀졌다. 거룩한 하나님이 그런 죄 많은 사람들 안에 거주하시는 것은 불가능하다. 신성과 인성 사이의 간격에 다리를 놓기 위해 하나님은 예수라 이름하는 사람이 되셔야 했다. 예수는 여호와 구원자란 뜻이다. 그러한 분으로서 그분은 우리 죄들을 위해 십자가 위에서 죽으사 모든 더럽힘에서 우리를 정결케 하시려고 그분의 피를 흘리셨다. 할렐루야! 무한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십자가 위에서 죽으시려고 유한한 인간이 되셨다. 이로써 하나님이 사람 속으로 들어오시는 것을 방해했던 장애물들이 제거되었다. 이제 그리스도 안에서 무한하시고 거룩한 하나님이 우리 속으로 오실 수 있다. 이런 이유로 10절에서 바울은 그리스도가 우리 안에 계신다고 선포한다.

하나님이 우리 안에 계신다고 말하지 않고 그리스도가 우리 안에 계신다고 말하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여기에서 그 영은 하나님과 그리스도를 연결시킨다. 그 영은 하나님의 영인 동시에 그리스도의 영이다. 이 모든 용어들은 얼마나 심오하고 다함이 없는가!

(위트니스 리, 로마서 라이프 스터디, 영문판 p.629-630)

그 영이 우리 안에 거처를 만드심

11절은 “예수를 죽은 자들 가운데서 살리신 분의 영이 너희 안에 거주하시면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들 가운데서 살리신 분이 너희 안에 거주하시는 그분의 영을 통하여 너희의 죽을 몸에도 생명을 주시리라”고 말한다. 10절에 따르면 그리스도가 우리 안에 계신다. 그러나 11절에 따르면, 예수를 죽은 자들 가운데서 살리신 분의 영이 우리 안에 거주하신다. 즉 그분의 영이 그분의 거처를 우리 안에 만드신다. 이 구절 안에서 우리는 삼일 하나님을 갖는다. 즉 예수를 죽은 자들 중에서 살리신 분(아버지), 그리스도 예수(아들), 그 영이다. 여기서 우리는 삼일 하나님이 그분 자신을 우리 속으로 분배하심을 본다. 더 나아가 그분은 그분의 거처를 우리 안에 만들고 계시며, 심지어 우리 죽을 몸에도 생명을 주신다. 이것은 우리 온 존재 안으로 삼일 하나님의 완전한 분배이다.

(위트니스 리 , 로마서 라이프 스터디, 영문판 p.630)

Back

II. 고린도후서 13장 13절-삼일 하나님의 누림

고린도 후서 13장
13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이 너희 무리와 함께 할지어다

삼중의 축복

13장 13절에서 우리는 삼중의 축복을 갖는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이 너희 모두와 함께 있을지어다.” 이 삼중의 축복은 삼일 하나님과 연관된다. 왜냐하면 여기에서 우리는 아들 그리스도의 은혜와 아버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을 갖기 때문이다.

구약에서도 우리는 또한 삼중의 축복, 즉 레위인 제사장이 민수기 6장 끝부분에서 선포한 축복을 본다. 이 삼중 축복 안에 삼일 하나님이 함축되어 있다. 민수기 6장 24절부터 26절은 이렇게 말한다. “여호와는 네게 복을 주시고 너를 지키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 얼굴로 네게 비취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햐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 할지니라 하라”. 첫 번째로 우리는 아버지와 관계된 축복을 갖는다.“여호와는 네게 복을 주시고 너를 지키시며”. 둘째로 우리는 아들과 관계된 축복을 갖는다. “여호와는 그 얼굴로 네게 비취사 은혜 비추시며”. 셋째로 우리는 그 영과 관계된 축복을 갖는다. “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을 주시며”. 레위인 제사장은 이 축복을 틀림없이 귀하게 여겼다. 그러나 이것은 고린도 후서 13장 13절과는 비교할 수 없다. 우리가 민수기 6장 24절에서 갖는 것은 단지 축복, 즉 누림이 없는 축복일 뿐 아니라 신격의 삼일성, 즉 아버지와 아들과 그 영 안에 있는 하나님이다.

(위트니스 리 , 고린도후서 라이프 스터디, 영문판 p.523)

우리의 유일한 축복이신 삼일 하나님

하나님의 사랑과 그리스도의 은혜와 성령의 교통을 말하는 것은 사실상 사랑은 하나님이고 은혜는 그리스도이며 교통은 성령이라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랑이신 아버지 하나님과 은혜이신 아들 하나님과 교통이신 성령 하나님을 갖는다. 이것은 우리가 직접적인 방법으로 우리의 누림이신 삼일 하나님을 갖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가 가진 것은 단지 그분으로부터 혹은 그분에 의해 받은 축복만이 아니다.

신약에 있는 참된 축복은 삼일 하나님 자신이다. 우리가 이미 지적했듯이 이 축복은 삼중, 즉 은혜와 사랑과 교통의 축복이다. 근원이신 사랑과 과정이신 은혜와 전달이신 교통으로 삼일 하나님은 우리의 생명과 우리의 생명 공급과 우리의 누림이 되기 위해 우리에게 도달하신다. 이제 우리는 실제적인 방법으로 온종일 삼일 하나님을 누릴 수 있다. 이것이 우리의 유일한 신약의 축복이다.

한 가지 일의 세 방면

주님의 은혜는 우리의 누림을 위해 우리에게 생명이 되시는 주님 자신이며(요1:17, 고전 15:10), 하나님의 사랑은 주님의 은혜의 근원이신 하나님 자신이며(요일 4:8, 16), 성령의 교통은 우리의 참여를 위해 하나님의 사랑과 함께 주님의 은혜를 전달하는 그 영 자신이다. 이것들은 분리된 세 문제가 아니라 한 가지 일의 세 방면이다. 주님과 하나님과 성령이 나누어진 세 하나님이 아니며, “동일하여 나누어지지 않고, 나눌 수도 없는” 세 하나님이다(필립 샤프). 하나님은 기원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사랑은 근원이다. 주님은 하나님의 표현이기 때문에 주님의 은혜는 하나님의 사랑의 과정이다. 그 영은 삼일 하나님 곧 아버지, 아들, 그 영을 신성한 속성과 함께 우리로 체험하고 누리게 하기 위한, 하나님과 함께 하시는 주님의 전달이다. 따라서 그 영의 교통은 하나님의 사랑과 함께 하는 주님의 은혜의 분배이다. 이 책이 그리스도의 은혜에 대한 책이기 때문에(고후1:12, 4:15, 6:1, 8:1, 9, 9:18, 14, 12:9) 여기에서는 주님의 은혜가 먼저 언급되어 있다. 세 가지 미덕들-사랑과 은혜와 교통-의 거룩한 속성과 세 가지 거룩한 본질-아버지, 아들, 그 영-의 삼일 하나님은 빗나가고 혼돈 되어, 격려 받지 못하고 회복되지 못한 고린도의 믿는이들에게 필요했다. 그러므로 사도는 그의 사랑스럽고 소중한 서신을 결론짓기 위해 한 문장 안에 이 거룩하고 귀한 모든 것들을 사용했다.

(위트니스 리 , 고린도후서 라이프스터디, 영문판 p.524-525)

세 본질들

앞의 단락에서 우리는 본질들(hypostases)이라는 말을 두 번 사용했다. 이 말은 더 많은 설명을 요한다. 이 말의 단수형은 본질(hypostasis)이다. 이것은 헬라어에서 영어화된 것이다. 이것은 헬라어의 두 단어 곧 아래(under)를 의미하는 전치사 휘포(hupo)와 지지 혹은 떠받침을 의미하는 스타시스(stasis)로 구성되어 있다. 그러므로 이 말은 아래에서 떠받치는 것, 밑받침, 즉 밑에서 지지하는 무언가를 가리킨다. 헬라어 휘포스타시스(hupostasis)는 9장 4절과 11장 17절에서 사용되었다. 이 말은 상부구조가 그 위에 놓여지는 기초 공사를 의미한다. 그러므로 그것은 기초와 입장을 의미하며 그렇기 때문에 9장 4절과 11장 17절에서는 확신으로 쓰였다. 우리가 합당한 기초 공사나 받침대를 가지고 있을 때에야 비로소 우리는 확신할 수 있다.

몇 몇 사전에서는 본질(hypostasis)이란 말을 삼일성의 세 인격과 연관시킨다. 이 단어의 의미가 그와 같은 사전에서는 그러한 해석을 갖는다. 본질이라는 말은 인격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러나 신학자들은 이 말을 신격의 삼위, 즉 아버지, 아들, 그 영을 가리키는 것으로 사용해 왔다. 실제로 아버지와 아들과 영은 세 본질들(hypostases), 즉 지지하는 신격의 본체들이다. 달리 말하면 신격은 아버지, 아들, 그 영의 지지하는 본체들로 구성된다. 이것은 만일 세 본질들이 없어진다면 신격은 그의 본체를 상실할 것임을 의미한다.

어떤 고대 성경 교사들은 본질(hypostases)이라는 말을 아버지, 아들, 그 영을 가리키는 것으로 사용했다. 또 다른 신학자들은 세 본질들(hypostases)은 신격의 세 인격들을 정의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인격이라는 말을 이렇게 사용한 몇몇 사람들은 아버지와 아들과 그 영이 세 하나님이라고 말하는 교리인 삼신론의 오류에 빠졌다. 우리가 이미 수차례 지적했듯이 그리피스 토마스(W.H.Griffith Thomas)는 인격이라는 말을 너무 강조하지 말아야 하며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삼신론을 지지하게 된다고 말했다. 그러므로 인격이라는 말을 이런 식으로 사용하는 것도 전혀 안전한 것은 못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말을 일시적으로 사용해야 할 필요가 있을 수 있다. 예를 들어, 우리는 우리의 찬송 중 하나에서 그 말을 사용한다. “이 어떤 비밀인가! 아버지, 아들, 그 영, 인격과 본질 안에서 셋 모두 하나일세!”(교회찬송81장) 그러나 비록 우리가 일시적으로 이 용어를 사용한다 할지라도 우리는 오직 한 분 하나님, 유일한 하나님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분명히 강조하여 밝히기 원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삼일-아버지, 아들, 그 영-이시다. 본질들(hypostases)이라는 용어는 삼일 하나님의 진리를 전달해 주려는 하나의 시도이다

(위트니스 리 , 고린도후서 라이프 스터디, 영문판 p.525-526)

삼일 하나님은 자신을 사람 안에 분배하심

고린도 후서 13장 13절은 신격의 삼일성이 조직 신학의 교리적인 이해를 위한 것이 아니라 그분의 삼일성 안에서 그의 택함 받고 구속받은 백성들에게 하나님 자신을 분배하기 위한 것임을 강하게 증명한다. 성경에서 삼일성은 결코 단지 일개 교리로 계시되지 않는다. 그것은 항상 하나님과 그의 피조물, 특히 그분이 창조한 사람과 더 나아가 선택받고 구속받은 그분의 백성들과의 관계와 관련되어 계시되거나 언급된다. 그분의 창조에 관한 그분의 거룩한 계시 안에서 첫 번째로 사용된 거룩한 칭호인 히브리어 엘로힘(Elohim)은 복수이다. (창1:1). 이것은 사람을 위해 하늘들과 땅을 창조한 창조자이신 그분이 삼일이심을 가리킨다. 그분의 형상과 그분의 모양대로 사람을 창조하는 것에 관해서 그분은 “우리(us)"와 ”우리의(our)"라는 복수 대명사를 사용함으로써 그의 삼일성을 가리키며(창1:26) 이는 그의 삼일성 안에서 사람과 하나 되어 사람을 통해 그분 자신을 표현하고자 하는 그분의 의도를 함축하고 있다. 후에 창세기 3장 22절과 11장 7절에서, 또는 이사야 6장 8절에서도 그분은 거듭하여 사람 또는 그분의 택한 백성들과 그분의 관계에 관해 그분 자신을 “우리”로 언급하셨다.

(위트니스 리 , 고린도후서 라이프 스터디, 영문판 p.526)

삼일 하나님에 대한 누림
(1) 은혜와 사랑과 교통

13장 13절에서 우리는 삼일 하나님에 대한 누림을 본다. 이 구절에서 바울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이 너희 무리와 함께 있을지어다.”라고 말한다. 주의 은혜는 우리의 누림을 위해 우리에게 생명이 되시는 주님 자신이고 (요1:17, 고전 15:10), 하나님의 사랑은 주님의 은혜의 근원 되시는 하나님 자신이며(요일 4:8, 16), 그 영의 교통은 우리의 참여를 위해 주님의 은혜를 하나님의 사랑과 더불어 전하는 전달이신 그 영 자신이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은 분리된 세 가지 것이 아니라 한 가지 것의 세 방면들이다. 이는 마치 주님과 하나님과 성령이 분리된 세 하나님이 아니라“분리되지 않고 분할되지 않는 한 분의 ...세 위격”(Philip Schaff)인 것과 같다. 하나님의 사랑은 근원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기원(origin)이시기 때문이다. 주님의 은혜는 하나님의 사랑의 통로이다. 왜냐하면 그 영은 우리로 삼일 하나님-아버지와 아들과 성령-과 그 신성한 속성들을 체험하고 누리게 하기 위한 주님과 하나님의 전달이기 때문이다. 13장 13절에서 주님의 은혜가 첫 번째로 언급된 것은 이 책이 그리스도의 은혜에 관한 것이기 때문이다.(1:12, 4:15, 6:1, 8:1, 9:8, 14, 12:9)

그러한 신성한 속성에 속한 세 가지 미덕들-사랑, 은혜, 교통-과 그러한 삼일 하나님의 세 위격들-아버지, 아들, 그 영-이 믿는이들에게 필요한데 이는 그들이 신성한 삼일성의 신성한 분배하심을 체험하기 위한 것이다. 이 구절은 신격의 삼일성이 조직 신학의 교리적 이해를 위한 것이 아니요, 그분의 삼일성 안에서 그분의 택함받고 구속받은 백성들 안으로 하나님 자신을 분배하기 위한 것임을 강하게 입증한다.

(위트니스 리 , 신성한 삼일성, 영문판 p.399-400)

소위 그리스도인 예배에서 성직자들은 예배의 끝 무렵에 13장 13절을 하나의 축도로서 사용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러나 이 구절은 삼일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누림에 대해 말한다. 당신은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을 누리고 있는가? 신성한 삼일성의 신성한 분배하심 안에서, 주님의 은혜, 하나님의 사랑, 그 영의 교통은 우리의 체험과 누림을 위한 것이다.

이미 지적했듯이, 마치 하나님의 사랑이 하나님 자신인 것처럼, 그리스도의 은혜는 그리스도 자신이다. 신약은 “하나님은 사랑이시라”고 말한다 (요일 4:8). 또한 우리는 그리스도가 은혜시요, 성령이 교통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만일 우리에게 하나님이 없다면 우리는 사랑의 누림을 가질 수 없을 것이다. 만일 우리에게 그리스도가 없다면 우리는 은혜의 누림을 가질 수 없을 것이다. 만일 우리에게 그 영이 없다면 우리는 교통의 누림을 가질 수 없을 것이다.

또한 우리는 13장 13절에서 사랑과 은혜의 교통이 분리된 세 가지 것들이 아니라는 사실에 대해 인상을 받을 필요가 있다. 그것들은 한 가지 것의 세 방면들이다. 사랑은 근원이요, 은혜는 그 근원의 표현이며, 교통은 그 표현의 전달이다. 근원인 사랑은 은혜 안에서 표현되며, 이 은혜는 교통에 의해 우리 안으로 전달된다. 하나님의 사랑은 그리스도의 은혜의 근원이며, 그 영의 교통은 그리스도의 은혜와 및 하나님의 사랑의 전달이다. 그러므로 사랑과 은혜와 교통은 모두 우리의 누림을 위해 우리 속에 있다.

(위트니스 리 , 신성한 삼일성, 영문판 p.400-401)

(2)동시적인 누림

우리는 사랑과 은혜와 교통을 모두 동시에 누린다. 우리는 먼저 사랑을 누리고 그 다음에 은혜를 누리고 마지막에 교통을 누린다고 생각하지 말아야 한다. 그 영의 교통을 누리는 동안 또한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도 누린다. 마치 아버지와 아들과 그 영이 세 하나님이 아니라 한 하나님의 세면 혹은 세 인격인 것처럼, 사랑과 은혜와 교통도 한 가지 것의 세 방면이다. 삼일 하나님은 사랑이 충만한 아버지, 은혜가 충만한 아들, 교통이 충만한 그 영이시다.

우리는 아버지의 사랑과 아들의 은혜와 그 영의 교통을 순차적으로 누린다고 생각지 말아야 한다. 그렇지 않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과 그리스도의 은혜와 그 영의 교통을 동시에 누린다.

비록 사랑과 은혜와 교통을 동시에 누린다 해도, 그럼에도 불고하고 우리는 사랑이 근원이요 은혜는 과정이요 교통은 종착지임을 지적할 수 있다. 당신은 우리의 목적지가 무엇인지 아는가? 그것은 바로 성령의 교통이다. 할렐루야, 우리는 사랑과 은혜와 교통이라는 세 방면에서 삼일 하나님과 그분의 미덕을 누린다!

(위트니스 리 , 신성한 삼일성, 영문판 p.401)

기도를 통해 삼일 하나님과 함께 머묾

우리가 만일 삼일 하나님을 누리고자 한다면, 기도하는데 더 많은 시간을 써야 한다. 그러나 우리는 수많은 것들을 위해 하나님께 간구한다는 의미로 기도해서는 안 된다. 그 대신 우리는 하나님과 함께 머문다는 의미로 기도해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이 타오르는 불이라고 말할 수 있으므로 기도에 의해서 불이신 그분 안에 머물러야 하고 또한 이 불로 하여금 하나님 자신에 속한 그 무엇이 우리 존재 안으로 타오르게 해야 한다.

만일 우리가 기도를 통해 아버지와 함께 머문다면, 하나님의 사랑 뿐 아니라 그리스도의 은혜도 체험할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누림을 위한 주님의 은혜의 풍성을 갖게 될 것이며, 이 은혜는 우리의 체험 안에서 우리에게 넘치고, 부요케 하고, 족하게 될 것이다. 특별히 이 은혜는 그리스도를 다른 사람들에게 사역하고 분배하는 데 있어서 우리를 유능하게 혹은 충분하게 만들 것이다. 이 충족시킴은 우리 속에 있는 넘치며 부요케 하는 은혜로부터 나온다.

우리가 아버지의 사랑과 함께 머물며 주님의 넘치는 은혜를 누리고 있을 때에, 또한 우리는 성령의 교통 안에도 있게 될 것이다. 실제로 우리는 흐르시는 그 영으로 인해 녹아질 것이다. 우리는 깊은 속에서 무언가 우리 속에서 흐르고 있다는 것, 성령이 우리 안에서 흐르고 있다는 것을 느낄 것이다. 이것이 성령의 교통을 누리는 누림이요 또한 삼일 하나님이 우리 존재 안으로 분배되시는 것이다.

(위트니스 리 , 신성한 삼일성, 영문판 p.403-404)

날마다 우리는 근원이신 아버지와 함께 더 많은 시간을 보내야 한다. 우리는 근원에 머물 수 있도록 기도할 필요가 있다. 오늘날 이 근원은 우리 영 안에 있다. 우리가 일정 시간 동안 아버지 하나님과 함께 우리 영 안에 머문다면 우리는 신성한 분배하심을 체험할 것이다. 근원이신 아버지와 함께 머무는 동안 우리는 그분으로부터 우리를 벗어나게 하는 방식으로 기도해서는 안 된다. 만일 우리 기도가 우리를 벗어나게 하고 있음을 발견한다면 우리는 그런 식으로 기도를 계속해서는 안 된다. 우리에게 필요한 기도의 종류는 우리로 근원이신 하나님과 함께 있게 하는 기도이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심지어 말씀 읽기에 의해서도 벗어나게 되서는 안 된다. 만일 말씀을 읽는 것이 우리를 주님 자신으로부터 빼앗아 가는 벗어남이 된다는 것을 발견한다면, 다시 우리의 영으로 돌이켜서 “주여, 당신을 찬양합니다. 당신과 함께 여기에 있는 것이 내게 얼마나 좋은지요!”라고 말할 필요가 있다.

우리는 종교적인 방식으로 주님께 기도하지 말아야 한다. 그 대신 우리는 친밀한 방식으로, 즉 우리에게 친근한 사람들에게 말하는 방식으로 그분께 말씀드려야 한다. 나는 당신이 주님께 친한 친구로 가서 그분께 말씀드리라고 권한다. 사복음서에 기록된 바에 의하면, 주님이 그분의 제자들과 함께 계셨을 때, 그들이 종교적인 방식으로 그분께 기도했다는 표시는 전혀 없다. 제자들은 마치 친구에게 말하는 것처럼 그분께 기도했다. 그들은 어떤 종교적 기도나 종교적 예배도 드리지 않았다. 우리에게는 이런 류의 기도, 즉 우리를 주님의 임재 안에 지켜주는 기도가 필요하다.

사실, 주님의 임재 안에 있는 것에 대해 말하는 것보다 나는 우리가 주님과의 하나 됨 안에있어야 한다고 말하고 싶다. 우리는 단순히 주님의 임재 안에 있는 것만이 아니다. 즉 우리는 그분과의 하나 됨 안에 있다. 친근한 방식으로 주님께 말하는 것은 우리를 이 하나 됨 안에 있도록 지켜 준다.

우리가 매일 이런 식으로 주님께 말하는 것을 실행한다면, 신성한 향기가 우리에게 침투 될 것이며, 관유가 우리에게 기름 바르고 인치실 것이며, 그 영의 “잉크”가 우리를 흠뻑 적셔줄 것이며, 신성한 빛이 우리를 비출 것이다. 그 결과 우리는 삼일 하나님으로 철저하게 침투될 것이다. 그럴 때 우리는 아버지의 사랑과 아들의 은혜와 그 영의 교통을 누릴 것이다. 이것이 오늘날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다.

(위트니스 리 , 신성한 삼일성, 영문판 p.404-405)

Bac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