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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성한 삼일성 안에서 세 분의 관계
생명이시며 생명 주는 분이신 삼일 하나님
과정을 거치고 완결되신 삼일 하나님
삼일 하나님에 대한 전통적인 이단들

위트니스 리를 인용

제 7 장
구약에 계시된 삼일 하나님

I. 하나님은 사람과의 관계에서 삼일이심

창세기 1장
26절 하나님이 가라사대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로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육축과 온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민수기 6장
24절 여호와는 네게 복을 주시고 너를 지키시기를 원하며
25절 여호와는 그 얼굴로 네게 비취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
26절 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 할지니라 하라.

이사야 6장
3절 서로 창화하여 가로되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만군의 여호와여 그 영광이 온 땅에 충만하도다

신격의 삼일성-아버지, 아들, 영-의 문제는 이미 구약에서 계시되었다:

1. 구약의 첫 문장은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창1:1)이다. 원문에서 주어 “하나님”은 복수인 셋이고, 동사는 단수이다. 이것은 하나님이 셋-하나임을 의미한다.

2. 창세기 1장 26절을 보면, 구약에서 하나님을 언급할 때 원문상 “하나님”이라는 단어가 복수인 셋으로 쓰였을 뿐 아니라, 하나님이 그 자신에 대해 말씀하실 때에도 “우리(us)"라고 하셨다. 그 후, 구약은 우리가 전에 지적한 이런 방식으로 몇 번을 다시 말한다. 이것은 외적으로 하나님의 위격(person)이 복수임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 창세기 1장 26절에서는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단어가 원문에서 단수이다. 비록 하나님이 “우리”라는 복수이지만, “우리”의 “형상”은 단수이다. 그러므로 이것 또한 하나님이 하나 안의 셋이란 의미를 갖고 있다.

3. 출애굽기 3장 6절에서 주님은 모세에게, “나는 네 조상의 하나님이니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니라”라고 말씀 하신다. 이 구절에서 하나님은 조상의 하나님으로서 삼중(threefold)이다. 아브라함의 하나님은 아버지를 강조하고, 이삭의 하나님은 아들을, 야곱의 하나님은 그 영을 강조한다(참조. “아브라함, 이삭, 야곱의 하나님” 또는 “그의 형상으로 변화됨”이란 제목으로 출판됨). 그러므로, 하나님이 여기서 그분 자신을 위해 계시하신 이름은 하나 안의 셋의 의미를 또한 갖는다. 비록 그분은 한 하나님이지만, 삼중의 문제가 있는데, 이는 삼중의 위격 곧 아버지, 아들, 그 영이다.

(위트니스 리, 삼일 하나님, 영문판 p.10-11)

4. 민수기 6장 24절부터 26절에서, 주님은 구약의 제사장들에게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삼중의 축복을 주라고 명령하셨다. 이것은 의심할 여지없이 축복을 주는 하나님이 세 위격 안의 한 분 이시기 때문이다. 첫 번째의 “네게 복을 주시고”와 “너를 지키시기를”은 분명히 아버지 하나님의 역사이고, 두 번째의 “네게 비취사”와 “은혜 베푸시기”는 명백하게 아들 하나님의 역사이며, 세 번째의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와 “평강 주시기”는 의심할 여지없이 그 영 하나님의 역사이다. 그러므로 이것은 삼일 하나님-아버지, 아들, 그 영-이 그의 선민들을 축복하시고, 은혜 베푸시고, 평강을 주시는 것을 의미한다.

5. 구약은 땅위의 제사장들이 하나님의 이름으로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삼중의 축복을 주는 것 뿐 아니라, 또한 이사야서 6장 3절에서는 하늘의 스랍(천사)들도 하나님께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라고 삼중의 찬양을 드린다고 했다. “거룩하다”라는 말을 세 번 반복하며 그들이 하나님을 찬양한 이유는 의심할 여지없이 그들이 찬양하는 하나님이 셋 안에 하나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서 8절에서 그들이 찬양하는 하나님은 그분 자신을 말할 때 “우리”라는 복수로 말씀하시는데 이것은 그분이 삼중의 위격을 갖고 있다는 뜻이다.

(위트니스 리, 삼일 하나님, 영문판 p.11-12)

6. 구약은 여러번 사람의 형태(신약시대엔 육신이 되어 사람의 형태를 취하신 그리스도)의 주의 사자가 주님 자신임을 언급한다(출3:2-6, 삿6:11,24, 13:15-24, 슥1:11-12, 2:8-11). 주의 사자와 주님이 둘로 보이지만 사실상 그들은 하나이다. 이것은 신약에서 하나님과 그리스도가 둘이지만 하나인 것처럼 신격이 세 위격이라는 사실 때문임이 틀림없다.

7. 시편 110편에서 다윗이 말하길, “여호와께서 내 주께 말씀하시기를 내가 네 원수로 네 발등상 되게 하기까지 너는 내 우편에 앉으라 하셨도다”라고 했다. 여기서 여호와는 물론 하나님이고, 다윗이 “내 주”라고 부른 분은 그분이 마태복음 22장 42절부터 45절에서 나타내셨듯이 주 예수님이다. 그래서 시편 110편은 하나님과 주 예수님에 대하여 말한다. 하나님은 여기서 그 자신을 "내(my)"라고 말씀하셨고, 주 예수님을 “너는(thou)”라고 말씀하셨다. 주 예수님은 하나님이지만, 여기서는 하나님이 그분에게 말씀하시고, 하나님과 그분 사이에 “내”와 “너는”의 차이를 두었다. 그분과 하나님은 한 분이시지만 두 분이시다. 이것은 신격의 세 위격의 무엇인가가 틀림없다.

8. 구약은 세 이름들-아버지, 아들, 영-을 계시한다. 사무엘하 7장 14절은 아버지와 아들에 대해 말한다. 이사야 9장 6절은 아들과 아버지에 대해 말한다. 시편 2장 7절은 아들에 대해 말한다. 에스겔서 36장 27절, 37장 14절, 39장 29절, 요엘 2장 28-29절 등등은 그 영에 대해 말한다. 위의 구절들에 따르면, 우리는 다음과 같은 사항을 역시 알 수 있다. 1)아들이 아버지로부터 나오므로 아버지는 근원이시다. 2)아들은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고 우리에게 오시므로 아들은 나타남이시다. 3)그 영은 우리가 갖고 누리기 위해 우리 안에 넣어졌음으로, 그 영은 우리 안에 들어오시는 분이다. 이 모든 사항은 신약에서 계시된 점들과 정확히 일치한다.

(위트니스 리, 삼일 하나님, 영문판 p.12-13)

히브리어 본문에서 우리는 창세기 1장 1절의 문장의 주어인 “하나님”이란 단어가 복수로 쓰였음을 보았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그러나 “창조하셨다”라는 단어는 술어로서 단수이다. 이것은 매우 의미가 깊다. 주어는 복수이지만, 술어는 단수이다. 성경의 첫 구절에서 삼일 하나님은 비밀스러운 방법으로 계시되었다. 히브리어의 단복수를 알지 않는 한 이것은 명확하지 않다.

그 후 창세기 1장 26절에서, 하나님은 “우리(us)"와 ”우리의(our)"이라는 복수명사들을 사용해 그 자신을 나타내셨다. “하나님이 가라사대,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이것은 정말로 문제를 일으킨다. 하나님이 단수인가 아니면 복수인가? 만약 우리가 하나님이 단수라고 말하면, 왜 하나님은 그 자신을 위해 복수 대명사를 사용하셨는가? 그리고 만약 우리가 하나님이 복수라고 말한다면, 가장 큰 이단이 된다. 우리는 하나님이 세 분이 아니라 한 분이라는 것을 안다. 하지만 이런 구절들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는가? 이 문제를 온전히 이해하기란 매우 어렵다. 이런 의미에서, 삼일 하나님은 우주 안에 가장 큰 비밀들 중 하나이다.

창세기 1장에서 3장으로 넘어 가겠다. 사람의 타락 이후, 하나님은 다시 그분 자신을 복수 대명사로 사용하셨다. “여호와 하나님이 가라사대 보라 이 사람이 선악을 아는 일에 우리 중 하나같이 되었으니 그가 그 손을 들어 생명나무 실과도 따먹고 영생할까 하노라 하시고”(창3:22).

창세기 11장에서, 사람들은 하나님에게 반역하여 바벨탑과 바벨성을 지었다. 그러자 하나님이 말씀하셨다. “자 우리가 내려가서 거기서 그들의 언어를 혼잡케 하여 그들로 서로 알아듣지 못하게 하자”(창11:7). 다시 한번 우리는 하나님이 복수 대명사를 사용하여 그분 자신을 나타내셨음을 본다.

사람과의 관계

하나님이 그분을 복수 대명사로 사용하실 때는, 항상 사람과 관계된다.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셨을 때, 그분은 그 자신을 복수 대명사로 사용하셨다. 하나님이 타락한 사람을 돌보실 때도, 그분은 다시 한번 복수 대명사를 사용하셨다. 그리고 하나님이 반역하는 사람을 다루실 때도, 복수 대명사를 사용하셨다. 이것은 삼일 하나님이 하나님과 사람과의 관계를 위한 것임을 의미한다. 창세기 1장에서, 하나님이 다른 모든 것들을 창조하실 때는, 결코 그 자신을 위해 복수 대명사를 사용하시지 않으셨다. 다른 모든 창조물들에게는 하나님이 단지 하나님 자신이었던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사람과의 관계에서 하나님은 언제나 삼일이시다.

구약에서 하나님이 복수 대명사로 그분 자신을 나타낸 경우가 또 있는데, 이것 역시 사람과의 관계였다. 이사야 6장 8절에서 찾아 볼 수 있는데, 이사야가 보좌 위에 하나님을 보았고, 그리고 그는 하나님이 물으시는 것을 들었다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실 때나, 타락한 사람을 돌보실 때나, 반역하는 사람을 다루시러 오실 때나, 사람에게 무언가를 선포하러 누군가를 보낼 때 그분이 삼일이었음을 볼 수 있다. 하나님과 사람과의 관계는 거의 항상 그분의 삼일이심에 관계되어있다.

(위트니스 리, 흐름지, 영문판 p.1415-1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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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I. 아브라함, 이삭, 야곱의 하나님

출애굽기 3장
6절 또 이르시되 나는 네 조상의 하나님이니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니라

이 단체적인 인격을 부르러 오시고 이 단체적인 사람을 다루시는 하나님은 삼일 하나님-아버지, 아들, 영-이셨다. 하나님은 불타는 가시떨기로부터 모세에게 말씀하셨을 때 이렇게 말씀하셨다. “나는 네 조상의 하나님, 곧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로라”(출3:6) 출애굽기 3장에서 우리는 주의 사자가 모세를 부르셨다는 것과, 주의 사자는 주님 자신이었다는 것과, 주님 자신은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었다는 것을 본다(2,4,6절).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지 않으셨다. “나는 아브라함, 이삭, 야곱, 요셉, 모세의 하나님이라” 그렇다. 그분은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라고 말씀하신다. 주님이신 이 하나님은 또한 주님의 사자이시다. 당신은 이것을 상상 할 수 있겠는가? 출애굽기 3장을 읽어본다면 2절은 주의 사자를 말하고, 4절은 주님을 말함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6절에서 주님 자신이신 주님의 사자는 모세에게,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다”라고 말씀하셨다. 당신은 이것을 세 하나님이라고 믿는가? 여기에 셋에 다른 둘, 즉 주님의 사자와 주님을 더한 것이 있다. 이러한 개체적인 다섯은 다섯 하나님인가? 주님의 사자와 주님은 분명히 둘이다. 당신은 확실히 주님의 사자를 주님 자신이라고 말할 수 있는가? 우리는 할 수 있다. 성경이 그렇게 말하기 때문이다. 결국 출애굽기 3장 14절에서 하나님은 모세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나는...이다(I AM)".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 같다, “나는 주님의 사자이다. 나는 주님이다.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다. 나는 이삭의 하나님이다. 나는 야곱의 하나님이다. 나는...이다. 나는 너희가 나는 이다를 이해하는지 못하는지 관심하지 않는다. 나는 너희가 나는 이다를 동의하지 않던지 관심하지 않는다”. 이 분이 우리의 하나님, 곧 단체적인 사람 위에 역사하시는 하나님이시다. 이 하나님은 주님의 사자이시며, 주님 자신이시며,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시며, 위대한 “나는...이다”이시다.

(위트니스 리, 창세기 라이프 스터디, 영문판 p.517)

(1) 아브라함의 하나님-아버지

아브라함에 대한 하나님의 부르심은 하나님 아버지의 역사였다. 아브라함의 본래 이름은 “높여진 아버지”를 의미하는 아브람이었으며, 대치된 이름인 아브라함이라는 이름은 “많은 무리의 아비”를 의미한다. 삼일 하나님 안에서의 첫 번째는 아버지이시며, 부르심 받은 자의 첫 번째는 아브라함이었다. 아브라함은 부르심 받은 자의 아버지였으며, 삼일 하나님의 첫 번째 역시 아버지이시다. 아버지는 생명의 근원이다. 그분은 또한 계획과 목적의 근원이시다. 하나님 아버지에게는 계획, 즉 목적이 있다. 목적이 있기 때문에 그분은 영원전에 선택하고 예정하셨다. 결국 시간 안에서 아버지는 부르심 받은자 들을 부르고, 의롭다 하시고, 용납하시고, 돌보시려고 들어오셨다. 선택하심과 예정하심은 부르심의 문제에 앞선다. 로마서 9장 11절을 읽어본다면 당신은 이 두 가지 항목을 야곱에게서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브라함 안에서 우리는 하나님 아버지와 관계된 거의 대부분의 체험을 본다. 이것은 매우 의미 있는 것이다.

(2) 이삭의 하나님-아들

이삭은 아들이었다. 삼일 하나님의 두 번째 또한 아들이심을 보는 것은 매우 흥미롭다. 아들은 무엇인가? 아들은 아버지로부터 나온 자이며, 아버지의 어떠하심과 가지신 모든 것을 유업으로 이어받고, 아버지가 갈망하는 모든 것을 성취하는 자이다. 이삭의 역사를 살펴 본다면 그가 이와 똑같았다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그는 아버지께로부터 나왔으며, 아버지의 모든 것을 이어받았으며, 아버지의 목적을 성취하기 위해 일했다. 이것이 이삭의 체험으로서, 삼일 하나님의 두 번째, 즉 아들 하나님과 일치하는 체험이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주 예수는 아버지로부터 오셨으며(요16:28), 아버지의 어떠하심과 가지신 모든 것을 이어받았으며(요16:15), 아버지의 뜻을 다 성취하셨다(6:38). 이삭의 생애는 그분의 생애에 일치한다.

(위트니스 리, 창세기 라이프 스터디, 영문판 p.517-518)

(3) 야곱의 하나님-영

이제 우리는 야곱에 이르렀다. 간교한 책략가 야곱에게는 다만 부르심과 상속에 대한 체험만이 아닌 더 많은 것이 필요했다. 그에게는 주로 그를 육 안에 있는 사람에서 그 영 안에 있는 사람으로 변화시킬 다루심이 필요했다. 그러므로 삼일 하나님의 세 번째가 간교하게 책략을 부리는 야곱을 훈련하여 그를 하나님의 왕자로 변화시키기 위해 역사하는 그 영이라는 것은 매우 의미 깊다. 그러므로 야곱 안에서 우리는 거듭남과 훈련과 변화와 생명의 성장과 성숙을 본다. 이 모든 것이 그 영의 역사이다. 그러므로 야곱의 하나님은 그 영 하나님이시다.

(위트니스 리, 창세기 라이프 스터디, 영문판 p.522-523)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체험들은 부르심 받은 단체적인 자들의 온전한 체험들이다. 이것을 보았다면 우리는 머리를 숙여 이렇게 말할 것이다. “오 하나님 아버지, 우리에게는 당신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당신의 계획과 목적과 선택과 예정과 부르심과 의롭다 하심과 용납하심과 돌보심이 필요합니다. 오 하나님 아들이여, 우리에게는 당신이 필요합니다. 상속을 받을 수 있도록 우리를 구속하시는 당신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아버지가 계획하신 모든 것과 하고자 의도하신 모든 것을 성취하시는 당신이 필요합니다. 오 하나님 영이여, 우리에게는 당신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우리를 거듭나게 하고, 훈련시키고, 변화시키고, 생명이 성숙하도록 우리를 자라게 하시는 당신이 필요합니다. 우리에게는 우리를 참 이스라엘로 만드는 당신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아버지가 계획하신 모든 것과 아들이 성취하신 모든 것을 우리에게 실제 되게 하시는 당신이 필요합니다. 오 삼일 하나님이여, 당신이 우리에게, 우리 안에서 이루신 모든 일을 인하여 당신께 머리를 숙여 경배하고 찬양하며 감사드립니다!

(위트니스 리, 창세기 라이프 스터디, 영문판 p.522-523)

“현재 우리는 모두 하나님의 부르심 받은 자들에 대한 체험의 과정 안에 있다. 우리 중의 어떤 이들은 아브라함이며, 어떤이들은 이삭이며, 어떤이들은 야곱이다. 이제 우리는 신학 아닌 체험 안에서 삼일 하나님을 누리고 있다. 우리는 교리적인 관념으로서의 그분이 아니라 체험적인 누림으로서의 그분을 소유하고 있다. 우리는 하나님 아버지와 하나님 아들과 하나님 영을 누리고 있다. 아버지의 부르심과 의롭다 하심과 받으심과 우리를 돌보심을 누리는 것은 얼마나 좋은지! 아들의 구속과 구원과 우리를 상속 안으로 이끄심과 하나님의 영원한 목적을 성취하심을 깨닫는 것은 얼마나 놀라운지! 영의 거듭나게 하심과 훈련시키심과 변화시키심과 우리를 자라고 성숙하게 하심을 체험하는 것은 얼마나 뛰어난 일인지! 우리는 다만 삼일 하나님에 관하여 토론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그분을 체험하고 있으며, 아버지와 아들과 그 영에 참여하고 있다. 삼일 하나님은 체험적으로 우리와 함께 계신다. 우리는 삼일 하나님을 체험하는 아브라함과 이삭과, 요셉을 포함하는 야곱들이다. 우리는 선택과 예정과 부르심과 의롭다 하심과 받으심과 돌보심과 구속하심과 상속받음과 하나님의 목적의 성취와 거듭남과 훈련하심과 변화와 성장과 성숙과 결국에는 통치하심을 누리고 있다. 주님을 찬양하자. 이분이 부르심 받은 단체적인 자들과 함께하는 삼일 하나님이시다.

(위트니스 리, 창세기 라이프 스터디, 영문판 p.523-5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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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II. 삼일 하나님을 상징하는 금등대

출애굽기 25장
31절 너는 정금으로 등대를 쳐서 만들되 그 밑판과 줄기와 잔과 꽃받침과 꽃을 한 덩이로 연하게 하고
36절 그 꽃 받침과 가지를 줄기와 연하게 하여 전부를 정금으로 쳐 만들고
37절 등잔 일곱을 만들어 그 위에 두어 앞을 비추게 하며
39절 등대와 이 모든 기구를 정금 한 달란트로 만들되
40절 너는 삼가 이 산에서 네게 보인 식양대로 할지니라

삼일 하나님의 표현

등대는 삼일 하나님의 표현을 상징한다. 이것만으로도 등대가 얼마나 비밀한가에 대한 인상을 우리에게 주기에 충분하다. 우주 가운데 삼일 하나님보다 더 비밀한 것은 없다. 더 나아가, 성경 안에 있는 신성한 계시 가운데 가장 수수께끼 같은 요소가 또한 삼일 하나님이다. 역대로 성경을 읽는이들은 성경에 있는 삼일 하나님의 계시로 인해 곤혹을 치뤄왔다. 오늘날에도 우리는 삼일 하나님에 대한 적절한 이해를 가지지 못한다. 그러나 등대가 삼일 하나님의 표현임을 보는 것은 매우 도움을 준다.

역대로 유대 백성은 등대를 소중히 여겨왔다. 그러나 어느 랍비도 등대가 삼일 하나님의 표현을 상징한다고 말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어떤 그리스도인들 중에서도 그러한 깨달음을 가진 사람을 알지 못한다. 사실상, 등대에 대한 이러한 이해는 주님의 회복 안에서 그분에 의해 최근에 회복된 진리이다. 여러 해 전에 우리는 등대가 삼일 하나님의 표현을 상징하는 것에 대해 아무 것도 말하지 않았다. 그러나 몇 해 전에 우리는 성경 안에서 등대가 삼일 하나님의 표현임을 보기 시작했다.

(위트니스 리, 출애굽기 라이프 스터디, 영문판 p.1067)

지난 세기에 어떤 교사들은 구약의 예표들의 의미를 강조하였다. 등대에 관하여 이 교사들은 등대가 세상의 빛이신 그리스도의 예표임을 주로 말하였다. 그들이 말한 것은 옳고 좋았다. 그러나 그것은 충분하지 않았다. 이러한 성경 교사들은 등대가 삼일 하나님의 표현이라는 것과 최종적으로 교회가 되는 것과 등대의 일곱 등불이 하나님의 일곱 영임을 보지 못하였다.

(위트니스 리, 출애굽기 라이프 스터디, 영문판 p.1068)

(1) 본질

등대의 본질과 대와 등불들을 깊이 상고할 때, 우리는 등대가 참으로 삼일 하나님의 표현임을 본다. 25장 31절에 의하면, 등대는 정금으로 만들어졌다. 그러므로 금이 등대 전체의 실질이요 요소이다. 예표론에서 금은 신성한 본성, 하나님 아버지의 본성을 상징한다. 등대의 이 본질의 요소를 깊이 살펴본다면 우리는 그것이 신성한 본성을 상징함을 볼 것이다. 그러므로 이것으로 인해 우리는 그 본성인 하나님 아버지가 바로 등대의 실질임을 볼 수 있다. 금등대는 하나님 아버지의 본성 안에 존재한다.

(2) 대

아버지 하나님은 눈에 보이지 않으며 추상적이다. 아들 하나님은 눈에 보이지 않는 이 분의 체현이시다. 대는 아버지 하나님의 체현이신 아들 하나님을 상징하는 형태이다. 등대의 이 확실한 형태는 금의 체현이다. 신약에 의하면 아버지 하나님은 아들 하나님 안에 체현되셨다. 여기 등대에서 우리는 아버지를 상징하는 본질을 보고 아들을 상징하는 견고한 형태를 본다.

(3) 등

출애굽기 25장 37절은, “등잔 일곱을 만들어...”라고 말한다. 이 일곱 등불은 성령 하나님이 그분의 표현을 위한 하나님의 일곱 영이심을 상징한다(계4:5, 5:6). 등의 빛남은 표현을 나타낸다. 그러므로 일곱 등불은 아버지 하나님의 체현이신 아들 하나님의 표현이다. 계시록에서 우리는 일곱 등불이 하나님의 영임을 본다.

우리는 등대 안에서 아버지 하나님을 상징하는 금의 요소와 아들 하나님을 상징하는 대와 성령 하나님을 상징하는 일곱 등불을 보는 까닭에 등대 자체가 삼일 하나님의 표현이라고 말할 수 있는 근거를 가진다.

(위트니스 리, 출애굽기 라이프 스터디, 영문판 p.1068-1069)

삼일 하나님을 상징하는 예표인 등대

이 금등대는 겉의 보이는 것보다도 더 많은 것을 갖고 있다. 그렇지 않으면 그것이 빛날 수 없다. 속의 내용이 빛나게 하는 것이다. 사실 등대는 삼일 하나님의 묘사이다. 삼일성의 교리는 성경에서 자세히 설명하지 않지만, 하나님이 삼일이신 것은 우리에게 매우 분명하다.

우리 하나님은 한 분이시고 그분은 또한 셋이시다. 그분은 유일한 하나님이시지만, 또한 아버지, 아들, 영이시다. 우리는 반드시 여기서 용어들을 사용하는 데에 조심해야 한다. 하나님이 세 위격들(persons) 안에서 존재한다고 말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위격(persons)이란 단어를 피하고 단지 그분이 하나 안에 세 분이라고 하는 것이 좋다. 이것이 삼일(triune)이 의미하는 것이다. 라틴(Latin)어에 어원을 둔 말로, 삼(tri)은 셋을 뜻하고 일(une)은 하나를 뜻한다. 이것은 하나와 또한 셋의 방면이다.

한면으로, 성경은 구약에서나 신약에서 분명히 하나님은 한 분이시라고 말한다. 시편 86편10절은 “주만 하나님이시니이다”라고 말한다. 이사야 45장 5절은 “나는 여호와라 나 외에 다른 이가 없나니 나 밖에 신이 없느니라”라고 한다. 고린도전서 8장 4절은 “하나님은 한 분 밖에 없는 줄 아노라”고 한다. 다른 한면으로, 아버지, 아들, 그 영이 분명히 언급되었다(마28:19; 고후13:13)

(위트니스 리, 생명 메시지, 영문판 p. 2권, 288-289)

말로서는 만족스럽게 삼일성의 비밀을 설명할 수 없다. 그러나 등대는 삼일성의 그림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그것은 정금 한 덩어리로 만들어진다(출25:36). 성막 안에 오직 한 등대만 있었지만, 등은 일곱 개가 있었다. 전체적으로 볼 때, 등대는 하나였다. 하지만 위에서 볼 때 일곱 등을 분명히 볼 수 있었다. 하나 안에 일곱인 등대였다.

등대는 정금 한 달란트로 만들어졌다. 이것은 아마 100파운드(pound)의 무게를 의미한다. 그러면 등대의 본체나 본질은 금이다. 금은 하나님의 본성을 나타낸다. 철(iron)과 달리, 금은 어디에다 놓아도 녹슬지 않고, 화학적으로 변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본성은 일정하고, 변하지 않고, 영원하다. 그래서 금은 본질과 근원이신 하나님 아버지를 나타낸다.

금은 규정된 형태로 만들어지고 이것은 기능을 나타낸다. 이 형태는 하나님의 형상인 그리스도이다(고후4:4; 골1:15).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셨을 때, 그분은 그분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셨다(창1:26).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형상이므로, 사람은 그리스도를 따라 만들어졌다. 어떤 의미에서 하나님은 물질적인 형상을 갖고 계시지 않지만, 다른 의미에서 그분은그분의 형상의 표현을 갖고 계신다. 사랑하는 아들인 그리스도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형상이다. 이 형상이 어떤 기능을 나타내는가? 그분은 하나님을 표현한다.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요1:18)

이 등대의 다른 특징은 일곱 등이다. 성경은 분명히 우리에게 이것들이 단순히 하나님의 영 그 자신인 하나님의 일곱 영이라고 말한다. 이 금등대는 표현된 삼일 하나님을 상징한다. 본질은 아버지, 형태는 아들, 그리고 표현은 그 영이다. 첫 번째 단계에서 등대는 그리스도를 나타낸다. 그분이 이 땅에 계셨을 때, 하나님 아버지의 본성은 그 분 안에 있었다. 아버지의 형상도 그분 안에 있었는데, 이것은 예수님이 철저히 그분을 나타냈기 때문이다. 그분이 사람들 사이에서 연합되셨을 때, 그리스도는 빛을 발하는 일곱 등이시기도 했다. 예수 그리스도는 삼일 하나님의 표현이다. 하나님은 그분 안에, 그분 위에 계셨고, 그분의 본질이셨다. 그분을 떠나서는 아무도 하나님을 찾을 수 없다.

(위트니스 리, 생명 메시지, 영문판 p. 2권, 289-2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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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V. 갈라진 반석으로 계시된 삼일 하나님

출애굽기 17장
1절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이 여호와의 명령대로 신 광야에서 떠나 그 노정대로 행하여 르비딤에 장막을 쳤으나 백성이 마실 물이 없는지라
2절 백성이 모세와 다투어 가로되 우리에게 물을 주어 마시게 하라 모세가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어찌하여 나와 다투느냐 너희가 어찌 하여 여호와를 시험하느냐
3절 거기서 백성이 물에 갈하매 그들이 모세를 대하여 원망하여 가로되 당신이 어찌하여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어서 우리와 우리 자녀와 우리 생축으로 목말라 죽게 하느냐
4절 모세가 여호와께 부르짖어 가로되 내가 이 백성에게 어떻게 하리이까 그들이 얼마 아니면 내게 돌질 하겠나이다
5절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백성 앞을 지나가서 이스라엘 장로들을 데리고 하수를 치던 네 지팡이를 손에 잡고 가라
6절 내가 거기서 호렙산 반석위에 너를 내하여 서리니 너는 반석을 치라 그것에서 물이 나리니 백성이 마시리라 모세가 이스라엘 장로들의 목전에서 그대로 행하니라

하나님의 율법의 권위로 인하여 매맞음

주님은 모세에게 그의 지팡이를 사용하여, “반석을 치라 그것에서 물이 나리니 백성이 마시리라”고 말씀하셨다(17:6). 우리는 반석이 모세의 지팡이로 강타 당하였다는 사실에 세심한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예표론에서, 모세는 율법을 상징하며 지팡이는 율법의 힘과 권위를 대표한다. 물론 반석은 그리스도를 예표한다. 지팡이로 반석을 치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율법의 권위에 의해 매맞으셨음을 상징한다. 하나님의 눈에 주 예수님은 유대인들에 의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율법에 의해 죽임을 당하셨다.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에 못 박히신 처음 세 시간 동안 사람의 손아래 고통 당하셨다. 그러나 마지막 세 시간 동안,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의 율법의 힘으로 매맞으시어 고통 당하셨다.

(위트니스 리, 출애굽기 라이프 스터디, 영문판 p.471-472)

반석과 그 영

많은 곳에서 성경은 하나님이 우리의 반석이라고 말한다. 신명기 32장 18절은 우리를 낳은 반석이 하나님이라고 한다. 이것은 우리의 반석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임을 나타낸다. 이 반석은 낳는 반석으로 생명이 충만하다. 사무엘하 22장 47절과 시편 95편 1절에서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 구원의 반석임을 본다. 더욱이, 이 반석은 우리의 힘이고 우리의 피할 반석이다. 이 반석은 우리의 피난 처, 보호, 덮게, 그리고 안전장치이다. 이사야 32장 2절은 주님을 “곤비한 땅에 큰 바위 그늘”이라고 한다. 우리가 곤비할 때, 우리는 이 반석의 그림자아래서 안식하고 새롭게 될 수 있다. 메마른 곳에서 하나님의 백성들을 기다리던 이 반석은 백성들이 생수를 마실 수 있도록 매맞았다.

매맞은 반석으로부터 흘러나온 물은 그 영을 예표한다. 요한복음 7장 38절과 39절은 “명절 끝날 곧 큰 날에 예수께서 서서 외쳐 가라사대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 하시니”라고 말한다. 이 말씀은 초막절 끝날에 말해졌다. 요한복음 7장 39절은 계속해서 “이는 그를 믿는 자의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고 말한다. 이것은 분명히 흐르는 물이 그 영을 상징함을 나타낸다.

여러 해 전에 나는 고대 예루살렘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초막절을 즐길 때 반석을 세웠다는 어떤 기사를 읽었다. 이 기사에 따르면, 그 바위 위로 흐르는 물은 유대인들의 조상들이 광야에서 방랑하고 매맞은 반석으로부터 흘러나온 물을 마셨던 것을 상기시킨다. 바위 옆에 있는 장막들은 조상들이 광야에서 살았고 광야에서 유랑했지만 매맞은 반석이 있어 생수로 그들의 목마름을 해결했음을 보여준다. 예수님이 일어서서 목마른 자들을 불러 그에게 와서 마시라고 했을 때 아마 그러한 배경이 문자 그대로 있었을 것이다.

흐르는 물에 대한 다른 구절은 요한복음 19장 34절에 있다. 여기서 주님이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후, “그 중 한 군병이 창으로 옆구리를 찌르니 곧 피와 물이 나오더라”라고 한다. 이것은 매맞은 반석에서 흘러나온 생수로 예표되었다.

(위트니스 리, 출애굽기 라이프 스터디, 영문판 p.472-473)

반석으로부터 나온 물은 부활 안에 있는 생명수이다. 부활은 죽임을 당하고 다시 살아 있는 어떤 것을 지칭한다. 그것은 또한 죽음을 통과한 어떤 것에서 솟아 나오는 생명을 가리킨다. 출애굽기 17장에 있는 생수는 반석으로부터 나왔다. 왜 하나님은 물을 반석으로부터 나오게 하셨는가? 그분은 전능하시므로 반석을 이용할 필요가 전혀 없으셨다. 그분은 간단히 땅을 열어 생수를 솟아나오게 하실 수 있었다. 성경에서 이 반석은 하나님의 구속과 그리스도의 성육신을 말한다. 그것은 또한 그리스도의 인성과 그분의 죽음을 말한다. 매맞은 반석으로부터 흘러나온 물은 성육신과 인생과 죽음 후에 솟아 나왔다. 그것은 오직 그리스도에 관한 이 주요 단계들이 성취된 후에야 흘렀다. 성경은 우리에게 반석이 그리스도이셨음을 분명히 말해준다. 어떻게 하나님이신 그리스도께서 반석이 되실 수 있었는가? 이것은 성육신과 인생을 포함한다. 반석이 되시기 위해 그리스도께서는 성육신 되셔서 얼마의 기간 동안 사람들 사이에 사셔야 했다. 결국, 그분은 십자가 위에 계셨을 때 하나님의 율법의 권위로 매맞으셨다. 그러므로, 17장 6절은 심오한 구절이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인생과 죽음을 포함한다.

(위트니스 리, 출애굽기 라이프 스터디, 영문판 p.488-489)

이제 성경에 묘사된 세 그림-흘러나오는 물이 있는 매맞은 반석, 찔린 옆구리로부터 흐르는 피와 물이 있는 십자가 위의 그리스도, 생명수의 강을 흘려보내시는 보좌 위의 하나님-을 보자. 이 그림들은 서로 다른 종류의 세 가지 물, 즉 반석에서 흐르는 물, 예수님의 몸에서 흐르는 물, 하나님의 보좌에서 흐르는 또 다른 물을 상징하는 것이 아니다. 아니다, 이 그림들의 물은 하나의 물을 가리킨다. 그러면 왜 말씀은 반석과 예수님의 몸과 보좌를 따로 묘사하는가? 더욱이 흐르는 물의 근원은 무엇인가? 그것은 반석인가, 예수님의 육신적인 몸인가, 보좌인가? 계시록22장 1절에 의하면 생수의 근원은 하나님의 보좌이다. 이 구절은 생명수의 강이 보좌로부터 나옴을 계시한다.

(위트니스 리, 출애굽기 라이프 스터디, 영문판 p.491)

생수의 흐름이 있는 하나님의 보좌는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 박하시기 오래 전에, 반석이 매 맞기 오래 전에 존재하였다. 보좌로부터 나오는 생수는 그리스도의 죽음 후가 아닌 그 전에 흐르기 시작하였다 성경에 있는 순서에 의하면 반석이 첫째요, 예수님의 육신적인 몸이 둘째요, 보좌가 셋째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보좌가 첫째이다. 생명수의 흐름은 보좌로부터 시작되었다. 반석이 매맞기 전에,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하시기 전에 생수는 이미 보좌로부터 흐르고 있었다. 출애굽기 22장 1절이 출애굽기 17장과 요한복음 19장 이후에 나오는 것만을 묘사한다고 생각지 말라. 이것은 영원으로부터의 어떤 것, 성경 전체를 포함하는 어떤 것에 관한 그림이다. 이것은 생수가 그리스도의 성육신 전에 흐르고 있었음을 가리킨다. 그러나 성육신은 생수의 흐름에 있어서 전진된 단계였다. 하나님은 그분의 보좌에서 구유로, 또한 한 목수의 가정 안으로 흐르셨다. 삼십 삼 년 반 뒤에 하나님은 십자가를 통하여 흐르셨고, 그리고 나서 부활 안에서 계속 흐르셨다. 성경은 하나님의 흐름의 이야기를 말한다. 수세기를 통하여 하나님은 흘러오고 계셨으며 그분은 오늘 여전히 흐르고 계신다. 그분의 흐름 안에서 그분은 성육신과 인생과 죽음을 통과하셨으며 그후에 부활 안으로 들어가셨다. 이제 부활 안에서 그분은 우리가 마실 수 있는 생수이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가 누리는 생명수는 부활 안에 있다.

성경은 하나님의 흐름의 이야기를 말한다. 수세기를 통하여 하나님은 흘러오고 계셨으며 그분은 오늘 여전히 흐르고 계신다. 그분의 흐름 안에서 그분은 성육신과 인생과 죽음을 통과하셨으며 그후에 부활 안으로 들어가셨다. 이제 부활 안에서 그분은 우리가 마실 수 있는 생수이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가 누리는 생명수는 부활 안에 있다.

(위트니스 리, 출애굽기 라이프 스터디, 영문판 p.492)

생명수는 우리의 생명이 되기 위해 흐르는 삼일 하나님이심

생명수는 우리의 생명이 되기 위해 흐르는 삼일 하나님이다. 생명수를 삼일 하나님이라고 말하는 것은 조직적이고 독단적인 신학을 배우는 사람들에게 충격을 줄 수 있다. 그들은 그러한 말을 이단적이라 여길 것이다. 생명수가 하나님과 어린양의 보좌로부터 흘러나온다는 사실은, 아버지 하나님이 근원이요 아들 하나님이 과정이며 그 영 하나님이 흐름이라는 것을 가리킨다. 고린도후서 13장 13절은 이것을 확증한다. 이 구절에서 바울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이 너희 무리와 함께 있을지어다”라고 말한다. 여기서 우리는 아버지의 사랑과 아들의 은혜와 그 영의 교통 혹은 흐름을 본다. 이것은 생수이신 삼일 하나님이시다. 오늘 우리가 마시고 있는 바로 그 생명수는 우리의 생명이 되기 위해 흘러나오는 삼일 하나님이다.

이러한 진술을 읽을 때 어떤 사람들은 생명수가 하나님 자신이 흐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생명의 흐름이라고 논박할 것이다. 그러면 하나님의 생명은 무엇인가? 우리는 이 질문에 온전하게 대답하거나 하나님의 생명이 무엇인지를 적절하게 설명할 길이 없다. 그러나 우리의 체험에서 우리는 생수가 바로 삼일 하나님 자신임을 안다.

삼일성을 교리적으로 이해하려 애쓰지 말라. 대신, 체험적인 방법으로 삼일 하나님을 알기를 추구하라. 매일매일 우리는 아버지와 아들과 그 영의 흐름을 체험할 수 있다. 나는 매일 흐르는 삼일 하나님의 좋은 누림을 체험함을 증거할 수 있다. 이 흐름을 떠나서는 내가 계속해서 직면하는 곤란과 어려움을 견딜 수 없을 것이다. 우리의 생명수이신 삼일 하나님의 흐름을 체험함을 인하여 주님을 찬양하자.

(위트니스 리, 출애굽기 라이프 스터디, 영문판 p.493-494)

인성에 도달하기 위해 그리스도 안에 체현된 하나님
(1) 사람들 가운데 살기 위해 성육신되심

우리 안으로 흐르기 위해 하나님은 인성에 도달하시려고 그리스도안에 체현되셨다(요1:14). 이것은 하나님이 사람들 가운데 살기 위해 성육신 되셨음을 뜻한다. 주 예수께서는 삼십 삼 년 반 동안 땅위에 사셨다. 사람 예수께서 땅 위에 사셨을 때 하나님이 그분 안에 사셨다. 이것은 역사적 사실이다.

(2) 해방되기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히심

어린 아이였을 때 나는 주 예수께서 십자가 위에 달리신 것을 슬프게 느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못 박히심에 관한 나의 이해는 나의 천연적인 관념에 따른 것이었다. 십자가에 못 박히심 없이는 그리스도 안에 체현된 하나님이 해방되실 길이 전혀 없었을 것이다. 성육신을 통하여 하나님은 주 예수님 안에 갇히시고 제한되셨다. 그러나 십자가에 못 박히심으로 말미암아 그분은 이 갇힘과 제한으로부터 해방되셨다. 주 예수께서는 전에 한 알의 밀이셨다. 만일 그분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셨다면 그분은 홀로 남아 계셨을 것이며(요12:24), 그분 안에 있는 것은 해방되지 못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그분은 땅에 떨어져 죽으셨으므로 해방되셨다. 한 알의 밀이 많은 밀을 낳았다. 하나님의 생명, 하나님의 본성, 모든 하나님의 부요하심이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심으로 말미암아 해방되었다.

(3)생명주는 영이 되기 위해 부활하심

성육신과 십자가에 못 박히심을 통과하신 후 그리스도께서는 생명 주는 영이 되시기 위해 부활하셨다(고전 15:45). 거듭거듭 나는 오늘 그리스도가 생명 주는 영이심을 지적할 부담이 있다. 처음부터 끝까지 성경은 삼일 하나님에 대한 계시이다. 창세기 1장 26절에서 하나님은 그분 자신을 “우리”로 언급하신다. 이것은 신격에 관한 삼일 본성(triune nature)에 대한 언급이다. 성경이 많은 것들을 말하지만 초점은 삼일 하나님이 성육신과 인생과 십자가에 못 박히심과 부활을 거쳐 만유를 포함한 생명 주는 영이 되셨다는 것이다. 나는 이 놀라운 사실을 선포함에 있어서 결코 지치지 않는다. 삼일 하나님의 흐름은 무궁무진하다. 우리가 신성한 관점으로 성경을 읽는다면 그 계시의 중심 초점이 삼일 하나님에 있고 생명 주는 영이 되기 위해 그분이 거치신 과정에 있음을 볼 것이다.

(위트니스 리, 출애굽기 라이프 스터디, 영문판 p.494-495)

그 영이 생명수임

그 영-생명 주는 영-이 생명수이다(요7:38-39). 우리는 생명수가 삼일 하나님임을 지적하였다. 이제 우리는 그 영이 생명수임을 말하고 있다. 어떤 사람들은 생명수가 그 영인지 삼일 하나님인지 의아해할 수 있다. 이것에 관하여 성경에 있는 신성한 계시를 이해할 수 있는 합당한 방법은, 생명수가 그 영이요 그 영이 삼일 하나님이요 삼일 하나님이 생명수라고 말하는 것이다. 성경에 계시된 것은 우리에게 온전한 순환을 가져다 준다. 요한복음 1장 1절에서 우리는, 태초에 말씀이 계셨다는 것과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다는 것과 말씀이 하나님이셨다는 것을 본다. 요한복음 1장 14절은 계속해서 말씀이 육신이 되셨음을 말한다. 육신 안의 마지막 아담인 그리스도께서는 그 영이 되셨으며 그 영은 말씀이다(엡6:17). 만일 우리가 이 놀라운 계시를 누리는 대신 교리적으로 분석하고 토론하기를 더 좋아한다면 손실을 당할 것이다. 하나님의 풍성함은 우리가 마시기에 유용하다. 우리가 거기에 참예한다면 자양분을 받고 풍성하게 공급될 것이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단지 그것들을 조사하고 분석한다면 이 누림과 공급을 빼앗길 것이다.

(1) 보좌에 계신 하나님의 흘러나옴

생명수이신 생명주는 영은 보좌에 계신 하나님으로부터 흘러나온다 (계22:1). 한면으로는 보좌에 앉아 계신 분이 하나님이시며 다른 한면으로는 그 보좌로부터 나오는 생명수가 또한 하나님이시다. 보좌에 계신 하나님으로부터 흐르는 물은 하나님의 권위를 가져다준다. 이 물을 마실 때 우리는 능력은 물론 권위를 받는다. 우리는 우리 안에 흐르는 생수로 말미암아 굴복된다. 더 나아가, 하나님의 보좌로부터 흐르는 생수는 우리에게 하나님의 생명의 부요함을 전달한다. 이것은 생명나무가 생명수 안에서 자라다는 사실로 암시된다(계22:2). 하나님의 생명의 부요함이 생수의 흐름 안에서 운반되므로 이 물을 마실 때마다 우리는 이 부요함을 받는다.

(2)매 맞은 그리스도를 통하여 흐름

그 영은 매 맞은 그리스도, 쪼개진 반석으로 예표되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흐른다(출17:6, 고전10:4). 이 흐름은 그리스도의 인성과 인생과 죽음을 포함한다. 우리는 우리 안에 있는 생수의 흐름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주님의 인성을 맛보거나 체험하거나 누릴 수 없다. 이 물을 마실수록 우리는 더 많이 그리스도의 인성과 인생과 죽음을 체험하고 누린다.

(위트니스 리, 출애굽기 라이프 스터디, 영문판 p.495-4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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