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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트니스 리를 인용

제 3 장
아들은 삼일 하나님의 체현이다

I. 아들은 하나님이다

이사야9:
6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서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

마태복음 1:
21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
23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은 2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

232 예수는 하나님이 주신 이름이고, “임마누엘”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라는 뜻으로 사람이 부른 이름이다. 구주 예수는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이다. 하나님은 예수이고 예수는 성육신하셔서 우리 가운데 사신 하나님이다(요1:14). 그는 단지 하나님이 아니라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이다.
(위트니스 리, 각주, 영문판, p. 11)

요한복음 1:
1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요한복음 20:
28 도마가 대답하여 가로되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

빌립보서 2:
6 그는 근본 하나님의
2본체시나 하나님과 3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62 하나님의 존재 양식이 아니라 표현을 의미한다 (히1:3). 하나님의 표현으로서 주님은 하나님의 인격의 본질과 본성에 있어 동일하다. 이것은 결국 그리스도의 신격을 의미한다.
63 비록 주님이 하나님과 동등하셨지만 그분은 이 동등함을 보물로 여겨 붙잡거나 계속 유지시키지 않으셨다. 오히려 그분은 하나님의 본성(nature of God)은 갖고 있되 하나님의 본체(form of God)를 내려놓고 자신을 비워 종의 형체(form of a slave)를 취하셨다.
(위트니스 리, 각주, 영문판, p. 966)

히브리서 1:
8 아들에 관하여는 하나님이여 주의 보좌가 영영하며 주의 나라의 홀은 공평한 홀이니이다

그는 하나님이다

우리 모두가 무엇보다도 그리스도가 하나님이라는 것에 동의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사야 9:6을 읽어보자. 이것은 놀라운 구절이다.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그 이름은......전능하신 하나님이라” 한 아기가 “전능한 하나님”이라 불리다니 얼마나 이상한가? 하지만 이 둘은 하나이다. 한 어린아이가 전능한 하나님이다. 이것을 믿을 수 있는가? 이것이 우리가 믿는 하나님과 히브리인들이 믿는 하나님과의 다른 점이다. 그들은 하나님이 유일한 하나님이고 전능한 하나님이라는 것을 믿는다. 그러나 이 하나님이 어린아이였다는 것을 믿지 않는다. 이사야 9:6에서 성경은 어린아이가 전능한 하나님이라고 불린다고 분명히 말한다. 이 아이는 베들레헴 마구간에서 태어난 예수이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가 바로 하나님이다.

요한복음 1:1은 그리스도가 영원부터 하나님이라는 것을 분명하고 정확히 말해준다. 로마서 9:5은 그리스도가 만물 위에 계셔 세세에 찬양을 받으실 하나님이라고 한다. 이 외에도 많은 구절들이 우리가 구주로 영접한 그리스도가 바로 하나님 자신이라는 것을 확신시켜 준다. “그 안에는 신성의 모든 충만이 육체로 거하고” (골 2:9)

(위트니스 리, 만유를 포함한 영, 영문판, p. pp. 3-4)

마태복음 1장에는 또 다른 놀라운 이름인 임마누엘이 있다 (마 1:23). 예수는 하나님이 주신 이름이다. 임마누엘은 사람들이 부른 이름이다. 임마누엘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뜻이다. 구주 예수는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이다. 예수 없이 우리는 결코 하나님을 만날 수 없다. 하나님은 예수이고 예수는 하나님이다. 예수 없이 우리는 결코 하나님을 찾을 수 없는데 그것은 그분이 우리 가운데 거하기 위해 성육신하신 하나님 자신이기 때문이다 (요 1:14a). 예수는 단순히 하나님이 아니다. 그 분은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구원받은 사람들을 의미한다. 우리가 바로 “우리”이다. 날마다 우리에게는 임마누엘이 있다. 마태복음 18:20에서 예수님은 두 세 사람이 그분의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그분도 그들 중에 있다고 하셨다. 이것이 임마누엘이 의미하는 바이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함께 모일 때 그분은 언제나 그분은 우리 사이에 계신다. 이 복음서에 마지막 구절인 마태복음 28:20에서 주님은 제자들에게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라고 하셨다. 임마누엘로서 예수님은 오늘날 여기에 계시다. 마태복음에 따르면 예수는 오셔서 결코 떠나지 않으셨다. 무덤 속에서 사흘 동안 계시다 부활 안에서 오신 후 결코 떠나지 않으셨다. 그는 임마누엘로서 우리와 함께 계신다.

우리가 예수님을 부를 때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느낌을 갖는다. 예수님 부르되 우리와 함께 하는 분은 하나님이다. 가끔 우리 그리스도인들 어리석게도 예수님이 하나님인지 아닌지 궁금해한다. 예수님을 부를 때 하나님을 발견하게 되는데도 우리는 예수님이 하나님인지 아닌지 궁금해하는 것이다. 예수님은 하나님이다! 그는 단지 하나님이 아니라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이다. 우리가 예수님을 부를 때 우리에게는 여호와가 있고 구주가 있고 구원이 있으며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이 있다. 우리가 있는 바로 그 곳에 하나님이 함께 계시다.

(위트니스 리, 마태복음 라이프 스타디, 영문판, p. 59)

로마서 9장 5절은 “조상들도 저희 것이요 육신으로 하면 그리스도가 저희에게서 나셨으니 저는 만물 위에 계셔 세세에 찬양을 받으실 하나님이시니라 아멘"이라고 한다. 여기서 조상들은 아브라함, 이삭, 야곱 등을 말한다. 또한 그의 인간의 본성 면에서 그리스도는 이스라엘 자손에게서 나왔다. 바울은 그리스도가 “만물 위에 계셔 세세에 찬양을 받으실 하나님이시니라”고 했다. 바울이 이 부분까지 썼을 때 그는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운 인격으로 가득 차 있었으며 그의 마음에 있는 것들을 다 쏟아 부어 “그리스도는 만물 위에 계셔 세세토록 찬양을 받으실 하나님이시니라 아멘”이라고 말한 것이다. 우리는 모두 주 예수 그리스도가 만물 위에 계셔 세세토록 찬양을 받으실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에 대해 깊은 인상을 받고 충분히 깨달으며 감사해야한다. 비록 육신으로는 유대인들의 후손에서 나오셨지만 그 분은 바로 무한하신 하나님이다. 그래서 이사야 9:6은 “우리에게 한 아이가 났는데......그 이름은 전능하신 하나님이라”라고 말한다. 우리는 신격이신 그분을 찬양하고 하나님으로서 영원히 경배한다.

(위트니스 리, 로마서 라이프 스타디, 영문판, p. 2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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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I. 아들은 아버지이다

이사야9:
6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

각주 1) 위 소 제목에서 말하는‘아들은 아버지이다’라는 표현은 이사야 9:6 본문에 근거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아들과 아버지의 동일시>는 삼위일체의 경륜적인 관점과 아버지와 아들 두 위격 사이의 본질적인 구별을 상실하지 않는 전제 하에 그렇다는 것입니다. 이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지방)교회 측의 신학전문지인 ‘확증과 비평’ 1996년 1월호 46-49쪽에 실린 캐리 로비쇼우 형제의 논문‘Some Biblical Trinitarian Conundrums'를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각주 2) 동일한 관점을 가지고 고후3:17을 해석한 박형용 박사의 ‘주는 영이시다’ 라는 논문에 대해서는 ‘신학지남’ 1978년 봄호(3월호, 통권 180권) 28-39쪽을, 고전15:45을 근거로 한 ‘높아지신 그리스도와 교회 안에서 활동하시는 성령의 본체적, 위격적 혼동이 없는 기능적으로 단일(functional oneness)’인 ‘그리스도와 성령의 동일시’에 대한 웨스터민스터 신학교 교수인 개핀(R. B. Gaffin) 박사의 주장에 대해서는 차영배 박사의 ‘성령론-구원론 부교재’ (도서출판 경향문화사, 1994) 48-61쪽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요한복음 14:
7 너희가 나를 알았더면 내 아버지도 알았으리로다 이제부터는 너희가 그를 알았고 또 보았느니라
8 빌립이 가로되 주여 아버지를 우리에게 보여 주옵소서 그리하면 족하겠나이다
9 예수께서 가라사대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
10 나는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 것을 네가 믿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는 말이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 그의 일을 하시는 것이라
11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심을 믿으라 그렇지 못하겠거든 행하는 그 일을 인하여 나를 믿으라

요한일서 2:
22 거짓말 하는 자가 누구뇨 2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부인하는 자가 아니뇨 아버지와 아들을 부인하는 그가 적그리스도니
23 아들을 1부인하는 자에게는 또한 아버지가 없으되 아들을 시인하는 자에게는 아버지도 있느니라

예수가 그리스도라고 시인하는 것은 그가 하나님의 아들임을 시인하는 것이다 (마 16:16; 요 20:31). 그러므로 예수가 그리스도임을 부인하는 것은 아버지와 아들을 부인하는 것이다.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신성한 인격을 부인하는 자는 적그리스도이다.
예수가 그리스도임을 부인하는 것은 아버지와 아들을 부인하는 것과 같다. 이러한 사실은 그리스도, 예수, 아버지, 아들이 모두 하나이고 이들 모두가 만유를 포함한 복합된 내주하는 그 영의 요소이며 성분임을 의미한다. 그 영은 지금 믿는이들에게 끊임없이 기름 부음이 있게 하며 (요일 2:20, 27) 이 기름 부음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 아버지, 아들 모두가 우리 내적 존재 안으로 기름 부어진다.

(위트니스 리, 각주, 영문판, p. 1270-1271)

231 아버지와 아들은 하나이므로 (요 10:30; 사 9:6) 아들을 부인하는 자에게는 아버지가 없고 아들을 시인하는 자에게는 아버지가 있다. 여기서 아들을 부인한다는 것은 사람 예수가 하나님이라고 고백하지 않는 것이며 이것은 그리스도의 신격을 부인하는 것으로 이단이다.
(위트니스 리, 각주, 영문판, p. 1271)

이사야 9:6은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고 한다.

이 아기는 누구인가? 예수이다. 이 아기는 어디서 태어났는가? 베들레헴 마구간이다.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에서 아들은 누구인가? 예수이다. 그는 누구의 아들인가? 하나님의 아들이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우리에게 독생자를 주셨다. 우리에게 난 아기일 뿐 아니라 우리에게 주신 바 된 아들이다. 하나님은 그의 아들을 우리에게 주셨다. 왜 기묘자라 불리는가? 그가 단순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를 이해하기란 쉽지 않고 충분히 이해할 수도 없다. 그는 기묘자다. 베들레헴 마구간에서 태어난 예수라는 이름의 이 아기는 또한 전능한 하나님이라고도 불린다. 이것을 믿는가? 유대인들은 믿지 않는다. 그들은 아기 예수가 전능하신 하나님이라는 것을 믿지 않는다. 만약 그들이 믿었다면 그들은 즉시 진정한 그리스도인들이 되었을 것이다. 나는 그것을 믿는다! 나의 하나님은 예수이다. 나의 하나님은 그 작은 아기이다. 베들레헴 마구간에서 마리아가 낳은 그 작은 아기는 나의 전능한 하나님이다! 그의 네 번째 이름은 영존하시는 아버지이다. 우리에게 주신 바 된 아들은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불린다. 그렇다면 그는 아들인가 아니면 아버지인가? 만약 그 아기가 우리에게 나신 전능한 하나님이라는 것을 믿는다면 우리에게 주신 바 된 아들이 영존하시는 아버지라는 것 또한 믿어야 한다. 아들이 아버지라는 전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에 따른 것이다.

요한복음 14:8, 9를 보자. “빌립이 가로되 주여 아버지를 우리에게 보여주옵소서 그리하면 족하겠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 이 말은 분명히 아들이 아버지임을 보여준다. 그러나 이 말을 왜곡해서 아들은 아버지가 아니라 단지 아버지를 대신한다고 하는 사람들이 있다. 아무런 왜곡이 없이 이 구절을 읽는다면 여기서 아들이 곧 아버지임을 깨닫게 될 것이다. 빌립은 아들에게 아버지를 보여달라고 했다. 아들은 놀라며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이라고 대답했다. 만약 우리라면 “이사야를 읽어보지 않았는가? 거기서 아들이 아버지임을 말해주고 있고, 아들이 지금 여기 있는데 왜 그에게 아버지를 보여달라고 하는가? 그가 아버지라”라고 대답할 수도 있으리라. 이런 연유로 그분은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다”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요 10:30).

아래 내용은 우리에 대한 소위 이단 문제를 어떻게 처리할지를 논의하던 모임에서 녹음한 것을 이용한 것이다. 그들의 대화 중에 이런 내용이 있었다.
“...어쨌든 이사야 9:6은 우리에게 한 아기가 났고 한 아들을 주신 바 되었는데 그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고 했습니다. 여기에서 예수는 아버지라 불립니다. 그렇죠? 그래서 그가 아버지인 것입니다. 이 구절이 말하는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이사야 9:6절이 그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보통 이 말을 잘 하지 않는 것은 전통 때문이죠.”
여기에 주목하라. 이 비평가들은 그들의 전통이 두려워 통상 예수가 아버지라고 말하지 않는다는 것을 인정하고 있다. 그들은 감히 진리를 말하지 못하고 우리를 공격한다. 우리가 전통을 위해 있는가? 당신은 전통에 관심을 두는가? 사람들이 통상 전통 문제를 고려하여 이것을 말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모든 그리스도인은 자신의 양심과 생각 안에서 이사야 9:6의 예수가 아버지임을 인정해야만 한다.

그러나 이 구절을 왜곡해서 “아들은 아버지라 불리긴 하지만 아버지는 아니다”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터무니없는 소리다. 당신이 어떤 이름으로 불리면서 그 사람이 아니라니! 한번은 어떤 사람이 나에게 “여기서 아버지는 아버지 하나님이 아닙니다. 그는 이스라엘 족속을 낳은 아버지입니다.”라고 말한 적이 있었다. 나는 “그렇게 말하지 마십시오. 여기서 ‘이스라엘의 아버지’라고 말하지 않고 ‘영존하시는 아버지’라고 말합니다. 만약 아버지라 불린 그 아들이 아버지가 아니라고 한다면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불린 아기 또한 전능하신 하나님이 아니라고 해야만 합니다. 하지만 분명히 그 아기는 전능하신 하나님입니다. 만약 하나를 인정한다면 다른 것도 결국 인정해야만 합니다.” 맑은 정신을 가진 사람은 이것을 부인할 수 없다.

아들은 아버지이다

이사야 9:6은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라고 한다. 이 구절에서 “전능하신 하나님”은 “아기”와 짝이되고 “영존하시는 아버지”는 “아들”과 짝이 된다. 그는 아기이지만 전능하신 하나님이다. 베들레헴의 말구유에서 태어난 아기는 전능하신 하나님이다. 아기와 전능하신 하나님이 하나이므로 아들과 영존하시는 아버지 역시 하나이다. 아들은 영원한 아버지이다. 이 문제를 충분히 설명하기란 정말이지 쉽지 않다. 그러나 성경은 말하고 있다.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그 이름은...영존하시는 아버지라.” 이 구절은 분명하게 아들이 아버지라고 말하고 있지 않은가? 만약 아들이 아버지가 아니라면 어떻게 “아들”이 “아버지”라고 불릴 수 있는가? 만약 우리가 이 구절에서 말하는 “아기”가 “전능하신 하나님”인 것을 인정한다면 우리는 또한 이 구절에서 말하는 “아들”이 “영존하시는 아버지”임도 인정해야한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성경의 분명한 계시를 믿지 않는 것이다. 우리는 이 말씀에 근거해 아기로 태어나신 주 예수님이 하나님이라는 것과 아들이신 주 예수님이 영존하시는 아버지이심을 철저히 믿는다. 우리의 주님은 아들이고 그는 또한 아버지이다. 할렐루야!

요한복음 14:7-11은 “너희가 나를 알았더면 내 아버지도 알았으리로다 이제부터는 너희가 그를 알았고 또 보았느니라 빌립이 가로되 주여 아버지를 우리에게 보여주옵소서 그리하면 족하겠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 나는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 것을 네가 믿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는 말이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 그의 일을 하시는 것이라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심을 믿으라 그렇지 못하겠거든 행하는 그 일을 인하여 나를 믿으라” 이 구절들에서 주님은 분명히 우리에게 그와 아버지가 하나하는 비밀을 계시하셨다. 그는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는 그 안에 있다. 그가 말할 때 역사하시는 분은 아버지이다. 사람들이 그를 볼 때 그들은 아버지를 보는 것이고 사람들이 그를 알 때 사람들은 아버지를 아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가 아버지이기 때문이다. 그분과 아버지는 하나이다 (요 10:30)

(위트니스 리, 삼일 하나님, 영문판, p. 17-19)

기도하는 아들은 듣는 아버지이다

이렇게 질문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요한복음 17장에서 주 예수님은 아버지에게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당신은 아들이 아버지라 말하는데 그렇다면 어떻게 아들이 아버지께 기도할 수 있습니까?” 이것을 설명하기란 어렵지 않다. 출애굽기 3:2-12의 앞부분에선 분명히 “여호와의 사자”가 모세에게 나타났다고 하는데 후에는 그가 “하나님”이라고 말한다. 대부분의 성경해설자들은 여기서 “여호와의 사자”가 삼일 하나님의 두 번째 인격인 그리스도를 말한다고 한다. 이것은 옳다. 그러나 6절은 그가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라고 말한다. 우리는 전에 아브라함의 하나님은 하나님이 아버지라는 것을 강조하는 표현이고 이삭의 하나님은 하나님이 아들이라는 것을 강조하며 야곱의 하나님은 하나님이 영이심을 강조한다고 지적했다. 그러므로 그는 단지 삼일 하나님의 두 번째 인격이 아니라 완전한 하나님이다. 그는 첫 번째 인격인 아버지이고 두 번째 인격인 아들이며 세 번째 인격인 그 영이다. 이 여호와의 사자는 바로 삼일 하나님이다. 삼일 하나님은 그 사자를 보내신 분이고 또한 보내심을 받은 사자이다.

보내신 주님이 보내심을 받은 사자이다. 보낸 자와 보내심 받은 자는 하나이다. 사사기 6:11-24와 13:15-24 역시 여호와의 사자(역시 그리스도를 나타냄)가 여호와 자신임을 계시한다. 스가랴서 12:8b 또한 “여호와의 사자”가 여호와 “하나님”임을 증명한다. 이것은 여호와 하나님이 그 자신을 그분의 사자로 보내셨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가 이 원칙을 이해한다면 아들이 아버지인데 아들이 아버지에게 기도했는지에 대해 더 이상 묻지 않을 것이다. 기도하는 자와 기도를 듣는 자, 기도하는 아들과 듣는 아버지는 하나이다.

(위트니스 리, 삼일 하나님, 영문판, p. 25-26)

스가랴서 2:8-11은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너희를 노략한 열국으로 영광을 위하여 나를 보내셨나니 무릇 너희를 범하는 자는 그의 눈동자를 범하는 것이라 내가 손을 그들 위에 움직인즉 그들이 자기를 섬기던 자에게 노략거리가 되리라 하셨나니 너희가 만군의 여호와께서 나를 보내신 줄 알리라 여호와의 말씀에 시온의 딸아 노래하고 기뻐하라 이는 내가 임하여 네 가운데 거할 것임이니라 그날에 많은 나라가 여호와께 속하여 내 백성이 될 것이요 나는 네 가운데 거하리라 네가 만군의 여호와께서 나를 네게 보내신줄 알리라”고 한다. 이 구절 역시 이점을 증명하고 있다. 여기서 말씀하신 분은 “만군의 여호와”다 (8절). 그런데 여기서 만군의 여호와는 “...만군의 여호와께서 나를 보내신 줄 알리라”(9, 11절)고 말씀하신다. 이것은 만군의 여호와가 만군의 여호와를 보냈다는 것이다. 그래서 8절에서 “만군의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나를 보내셨나니”라고 했다. 그렇다면 누가 누구를 보냈다는 말인가? 누가 “그”고 누가 “나”인가? 우리가 어떻게 읽던지 그 뜻이 명확하지 않다. 심지어는 성경 번역자들도(중국어역) 결정할 수 없었다. 그래서 그들은 어떤 구절은 “그”라고 번역하고 “나”라는 각주를 붙였고 또 다른 구절에서는 “나”라고 번역하고 “혹은 그”라는 각주를 붙였다. “그”는 “나”이고 “나”는 “그”이기 때문이다. 만군의 여호와는 “그”이고 만군의 여호와는 또한 “나”이다. 만군의 여호와는 보내신 분과 보내심 받은 자 둘 다이다. 만군의 여호와가 보내신 자인 동시에 보내심 받은 자이므로 기도하는 아들이 기도를 듣는 아버지가 되지 못할 이유가 없다. 기도를 듣는 아버지는 기도하는 아들이다. 기도하는 아들은 또한 기도를 듣는 아버지다. 앤드류 머레이가 말하길 최고의 기도는 우리 안에 계신 그리스도가 하늘 보좌 위에 계신 그리스도께 하는 기도라고 했다. 기도하는 이와 기도를 듣는 이는 동일한 그리스도이다.

교리 면에서 이 문제를 적절히 설명하기란 어렵다. 그러나 정말이지 어려운 것은 이것을 우리의 체험 안에서 설명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이 된 후 처음에 나는 일반적인 관념에 따라 하늘에 계신 주님께 기도했다. 그러나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난 후 하늘에 계신 주님이 내 안에 들어와서 사시는 것 같았다. 그 당시 나는 그가 하늘에 계셔서 나의 기도를 듣고 계신지 아니면 내 안에 내주하셔서 내 안에서 기도하시는지 알지 못했다. 물론 내 안에서 성령이 나를 도와 기도했다고도 말할 수 있다 (롬 8:26). 그러나 사실상 내 안에서 나를 도와 기도하는 성령은 또한 하늘에 계신 주님이다. 그러므로 내 안에서 기도하는 분은 하늘에서 내 기도를 듣는 분이다. 이 두 분은 동일하다.

(위트니스 리, 삼일 하나님, 영문판, p. 26-27)

로마서 8장은 한편으로는 오늘날 주님이 하늘에 계시다고 하고 (34절) 다른 한편으로는 우리 안에 계시다고 말한다 (10절). 이것은 현재 그 영이 되신 주님에 관하여 말할 때 옳은 설명이고 주님이 육신을 입고 계셨을 때에도 옳은 설명이다. 그는 니고데모에게 자신이 “하늘에서 내려온 자”였고 “하늘에 올라간 자”라고 말씀하셨다 (요3:13). 그래서 그분이 요한복음 17장에서 기도할 때 그는 이 땅에 있었고 동시에 하늘에 있었다. 그는 이 땅위에서 기도한 분이었고 동시에 하늘에서 기도를 들었던 분이었다.

(위트니스 리, 삼일 하나님, 영문판, p. 27-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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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II. 아들의 성육신은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임

마태복음 1:
18 예수 그리스도의 나심은 이러하니라 그 모친 마리아가 요셉과 정혼하고 동거하기 전에 성령으로 2잉태된 것이 나타났더니
20 이 일을 생각할 때에 주의 사자가 현몽하여 가로되 다윗의 자손 요셉아 네 아내 마리아 데려오기를 무서워 말라 저에게 잉태된 자는 성령으로 된 것이라

182 비록 그리스도가 마리아에게서 났지만 (16절) 그는 “성령으로 잉태되었다”. 그리스도의 출생은 전적으로 성령에 인한 것이었다 (20절). 그의 근원은 성령이고 그의 요소는 신성이다. 동정녀 마리아를 통해 주님은 혈과 육, 즉 사람의 본성을 입고 “육신의 모양” (롬 8:3), “사람의 모양” (빌 2:8)으로 나타나셨다.

(위트니스 리, 각주, 영문판, p. 10)

누가복음 1:
35 천사가 대답하여 가로되 성령이 네게 임하시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능력이 너를 2덮으시리니 이르므로 나실 바3거룩한 자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으리라

352 구름이 변화산과 (마 17:5) 장막 위(출 40:34, 38)를 덮은 것과 같다. 이 구절에 따르면 그녀가 거룩한 자를 잉태하도록 능력으로 임한 성령이 마리아의 위에만 있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마태복음 1:18, 20은 마리아가 “성령으로 잉태된 것이 나타났더니”와 “저에게 잉태된 자는 성령으로 된 것이라”라고 말한다. 이것은 그녀가 아기 예수를 낳기 전에 성령의 신성한 본질이 이미 마리아의 태 안에도 생긴 것을 보여준다. 처녀가 성령으로 잉태됨은 신성한 본질과 사람의 본질이 합하여 이루어진 일이며, 신성한 본성과 사람의 본성을 연합시킴으로 하나님-사람을 낳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 하나님-사람은 완전한 하나님이고 완전한 사람으로 신성한 본성과 사람의 본성을 각기 가지고 있으며 제 삼의 본성을 가지지 않는다. 이 사람이 가장 놀랍고 훌륭한 ‘여호와 구원자’이신 예수다.
(위트니스 리, 각주, 영문판, p. 278)

침례 요한의 잉태와 구주 예수의 잉태는 본질적으로 확연히 다르다. 침례 요한의 잉태는 나이든 여인에게 나타난 하나님의 기적으로 단지 하나님의 능력에 의한 것이지 하나님의 신성한 본성과는 무관하다. 침례 요한은 하나님의 영으로 채워진 (1:15) 사람으로 태어났을 뿐 하나님의 본성을 갖지는 못했다. 반면 구주 예수의 잉태는 하나님의 성육신으로 (요1:14), 하나님의 능력뿐만 아니라 사람의 본질에 신성한 본질이 더하여져 이루어졌다. 그 결과 신성과 인성을 모두 지닌 하나님-사람이 태어난 것이다. 하나님은 자신을 인간에게 연결하심으로 육신으로 나타난 바 되었고 (딤전 3:16) ‘사람이신 구주’(Man-Savior, 이하 사람-구주)가 되셨다 (2:11).

353 잉태가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 같이 이 잉태로 말미암아 태어난 사람 또한 거룩한 사람으로 그는 내재적으로 거룩하다. 이 분이 우리의 구주 예수다.
(위트니스 리, 각주, 영문판, p. 279)
신성한 본질로 성령으로 잉태된 사람-구주

우리는 주 예수님이 사람-구주라는 것을 보아야 한다. 사람-구주로서 그분은 신성한 본질로 성령에 의해 잉태되었다. 예수님의 전기(傳記)인 사복음서에서 누가는 다른 복음서와는 달 예수님의 잉태에 대해서도 기록했다. 다른 전기들은 그가 태어나신 것을 말한다 하더라도 그의 잉태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는다. 이 문제에서 누가는 독특하다. 그는 사람-구주가 어떻게 잉태되었는지에 대해 말한다. 그는 사람으로 말미암아 잉태된 것이 아니라 신성한 본질로 성령으로 말미암아 잉태되었다.

성령은 사람에게 도달하는 하나님 자신이다. 이 뜻은 하나님이 사람에게 도달할 때 성령으로 오신다는 것이다. 사람-구주의 잉태로 성령은 인성 안으로 오셨다.

우리는 사람-구주가 신성한 본질로 성령으로 말미암아 잉태되었음을 지적했다. 여기서 “본질”이란 단어는 본성보다 더 내재적인 무언가를 강하게 표현하기 위해 사용되었다. 본질은 어떤 물질의 내재적인 조성이다. 사람-구주는 신성한 본성뿐 아니라 신성한 본질로 성령으로 말미암아 잉태되었다. 우리가 이것을 보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위트니스 리, 누가복음 라이프 스타디, 영문판, p. 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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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V. 아들은 아버지와 함께 아버지로부터 왔다

요한복음 1:
14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4아버지의(아버지로부터 나온)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144 헬라어 전치사 파라(para)는 ‘~의 옆에’라는 의미인데 여기서는 ‘~와 함께 ~로 부터’의 뜻으로 사용되었다. 주님은 하나님에게서 왔을 뿐 아니라 하나님과 함께 오셨다. 그는 하나님께로부터 온 한편 여전히 하나님과 함께 하셨다 (8:16, 29; 16:32).
(위트니스 리, 각주, 영문판, p. 409)

요한복음 6:
46 이는 아버지를 본 자가 있다는 것이 아니라 오직 1하나님에게서 온 자만 아버지를 보았느니라

461 헬라어 전치사 파라(para)는 ‘~의 옆에’라는 의미인데 여기서는 ‘~와 함께 ~로 부터’의 뜻으로 사용되었다. 주님은 하나님에게서 왔을 뿐 아니라 하나님과 함께 오셨다. 그는 하나님께로부터 온 한편 여전히 하나님과 함께 하셨다 (8:16, 29; 16:32).
(위트니스 리, 각주, 영문판, p. 438)

요한복음 8:
16 만일 내가 판단하여도 내 판단이 참되니 이는 내가 혼자 있는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가 나와 함께 계심이라
29 나를 보내신 이가 나와 함께 하시도다 내가 항상 그의 기뻐하시는 일을 행하므로 나를 혼자 두지 아니하셨느니라

요한복음 16:
27 이는 너희가 나를 사랑하고 또 나를 l하나님께로서 온 줄 믿은 고로 아버지께서 친히 너희를 사랑하심이니라
32 보라 너희가 다 각각 제 곳으로 흩어지고 나를 혼자 둘 때가 오나니 벌써 왔도다 그러나 내가 혼자 있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나와 함께 계시느니라

271 헬라어, 파라(para), ~의 옆에. 여기서의 의미는 ~로부터 ~와 함께. 6:461 참고.
(위트니스 리, 각주, 영문판, p. 490)
아들과 함께 오심

아버지는 아들을 보냈고 아들과 함께 왔다 (요 17:8; 17:8?. 우리는 이것을 설명할 능력이 없다. 일반적으로 내가 당신을 보낼 경우 당신은 나를 위해 가고 나는 집에 남아있게 된다. 그러나 아버지가 아들을 보낼 때는 그렇지 않았다. 그가 아들을 보냈을 때 그는 아들과 함께 왔다. 헬라어 전치사 파라(para)는 단지“~로부터”가 아니라 “~로부터 ~와 함께”의 뜻이다. 다비(J.N.Darby)는 요한복음 6:46에 대한 그의 노트에 파라는 ~로부터 ~와 함께 라는 뜻이라고 적어놓았다. 이것은 아들이 왔을 때 아버지와 함께 왔음을 뜻한다. 아버지는 아들을 보냈고 아들과 함께 왔다. 요한복음 16:32에서 주님은 “보라 너희가 다 각각 제 곳으로 흩어지고 나를 혼자 둘 때가 오나니 벌써 왔도다 그러나 내가 혼자 있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나와 함께 계시느니라”라고 하셨다. 여기서 주님은 분명히 그분은 혼자가 아니라 그를 보내신 아버지와 함께 계신다고 하셨다. 이전에 주님은 8:29에서 비슷한 말씀을 하셨다:“나를 보내신 이가 나와 함께 하시도다 내가 항상 그의 기뻐하시는 일을 행하므로 나를 혼자 두지 아니하셨느니라.”

아들 안에서 살고 역사함

아버지는 아들과 함께 왔을 뿐 아니라 아들이 이 땅에 오신 후 살고 역사할 때에 아버지도 그와 함께 살고 역사했다. 그가 살 때 아버지도 살았고 그가 역사할 때 아버지도 역사했다. 요한복음은 분명히 아들이 말할 때 아버지가 역사한다고 말하고 있다 (14:10-11).

(위트니스 리, 신성한 삼일성, 영문판, p. 109-110)

아버지로부터 나뉠 수 없는 아들

아버지를 아들로부터 나누려 하거나 아들을 아버지로부터 나누려 하지 말라. 신약은 아들이 여기 있는 동안 아버지도 그와 함께 있다고 계시한다. 더욱이 그 영의 오심은 또한 아들의 오심이고 아들은 언제나 아버지와 함께 오신다. 요한복음 6:46은 “이는 아버지를 본 자가 있다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에게서 온 자만 아버지를 보았느니라”고 한다. “~로부터”라고 번역된 전치사는 파라(para)이다. 여기서 이 전치사의 의미는 “~로부터 ~와 함께”이다. 주님은 하나님에게서 오셨을 뿐 아니라 하나님과 함께 오셨다. 그는 하나님으로부터 오셨고 여전히 하나님과 함께 계셨다(요 8:16, 29; 16:32). 이 구절들에서 주님은 “나는 내 아버지로부터 내 아버지와 함께 왔다. 내가 아버지로부터 올 때 나는 아버지와 함께 온다.”라고 말씀하시는 것 같다. 이것은 아들이 올 때 아버지도 그와 함께 계시다는 뜻이다. 아들이 아버지께 보내심을 받았을 때 아들은 아버지에 의해 보내졌을 뿐 아니라 또한 아버지와 함께 왔다. 아버지가 아들을 보냈을 때 아버지는 아들과 함께 오셨다. 그러므로 우리가 아들을 영접할 때 우리는 아버지를 영접한다.

(위트니스 리, Spirit and the Body, 영문판, p. 40-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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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 아들은 그 영이다

요한복음 14:
16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니
17 저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저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저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저를 아나니 저는 너희와 함께 2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
18 1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 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
19 조금 있으면 세상은 다시 나를 보지 못할 터이로되 너희는 나를 보리니 이는 내가 살았고 너희도 살겠음이라
20 그 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

172, 181 17절의 진리의 영(실제의 영, the Spirit of reality)이신 그는 18절에서 주님 자신이 되어 '내가'라고 말씀하신다. 이 뜻은 그의 부활 이후 주님은 실제의 영이 되셨다는 것이다. 고린도전서 15:45는 이것을 확증한다. 부활의 문제를 다루는 이 구절은 “마지막 아담은 생명 주는 영이 되었나니”라고 말한다.
(위트니스 리, 각주, 영문판, p. 481)

고린도전서 15:
45 기록된 바 첫 사람 아담은 산 영이 되었다함과 같이 마지막 아담은 살려주는 영(생명 주는 영)이 되었나니

고린도후서 3:
17 2주는 영이시니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함이 있느니라
18 우리가 다 수건을 벗은 얼굴로 거울을 보는 것같이 주의 영광을 보매 저와 같은 형상으로 화하여 영광으로 영광에 이르니 곧 (11)주의 영으로 말미암음이니라

172 2:12부터 시작하는 이 부분의 맥락을 따르면 여기서 주는 반드시 주 그리스도를 가리켜야만 한다 (2:12, 14, 15, 17; 3:3, 4, 14, 16; 4:5). 그렇다면 이 구절은 그리스도가 그 영이라고 강조하는 성경의 강한 말씀이다. “16절의 주 그리스도는 그 영이며 그 영은 새 언약인 신약의 전반에 퍼져서 생명을 불어넣어 주고 있다. 우리는 이러한 새로운 언약을 사역하고 있으며 이 사역은 영광이 있다 (8절). 로마서 8:9-11과 요한복음 14:16, 18을 비교해 보라”(빈센트). “16절의 주는 그 영이고...그 영은 6절의 살리는(생명 주는) 영이다. ‘그리스도’를 의미하는 16절의 ‘주’는 ‘그 영’이며 그 영은 성령이다:...여기서 그리스도는 ‘그리스도의 영’이다”(알포드). “변화시키고 내주하시는 영은 그리스도 자신이다. ‘주는 영이시다’”(윌리스톤 워커).
(위트니스 리, 각주, 영문판, p. 830)
1811 주의 영은 하나님 아버지나 주 그리스도와 같은 복합적인 명칭이다. 이 표현은 다시 한번 주 그리스도가 그 영이고 그 영은 주 그리스도라는 것을 증명하고 확증한다.

(위트니스 리, 각주, 영문판, p. 831)

주님이 우리의 생명이 되는 길은 한가지 밖에 없다. 그것은 영 안에 있는 것이다. 만약 주님이 그 영이 아니라면 그는 우리 안으로 들어와서 우리의 생명과 생명 공급이 되지 못할 것이다. 이것이 요한복음 14장에서 17장까지 주님이 우리에게 가르치시는 것이다. 이 네 장이 주로 강조하고 있는 것은 죽음과 부활을 통해 주님이 육에서 영이 되신 것이다. 그는 죽고 부활함으로 육에서 영으로 형체를 바꾸어야만 했다. 요한복음 6:63에서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라고 하셨다. 그가 영이 아닌 육에 있는 동안 우리에게 들어와 생명을 주실 수가 없었다. 죽음과 부활을 통해 그는 육에서 영으로 변화되셨다. 그리고는 부활 이후에 제자들에게 오셔서 그들을 향해 숨을 내쉬며 “성령을 받으라”(요 20:22)고 말씀하셨다. 이것은 제자들이 그를 성령-신성한 호흡-으로 영접했음을 가리킨다.

(위트니스 리, 침례, 영문판, p. 3-4)

고린도후서 3:17은 “주는 영이시니”라고 말한다. 여기서 “주”는 물론 주 예수님이다. 그리고 “영”은 물론 성령이다. 이것은 우리에게 주 예수님이 성령이라고 분명하고 정확하게 말해주지 않는가? 우리의 주님은 성령이다. 그는 아버지이며 또한 성령이다. 그분은 모든 것이다!

많은 형제 자매들이 다비(Darby)의 새 번역 성경을 갖고 있다. 다비는 지난 세기 성경에 대한 가장 뛰어난 지식을 지닌 사람으로 여겨졌다. 어떤 이들은 그를 해설의 왕이라고 불렀다. 그의 새 번역 신약에서 그는 고린도후서 3:17절 이전의 구절들인 7절부터 16절까지를 괄호 안에 넣어서 6절 뒤에 바로 17절이 따라오는 것처럼 보이도록 했다. 6절의 마지막 부분은“영은 살리는 것임이니라”이다. 그러므로 다비가 깨달은 바에 의하면 17절의 “주는 영이시니”가 의미하는 바는 6절에서 언급한 주가 살리는 영(생명 주는 영)이라는 것이다. 물론 살리는 영(생명주는 영)은 성령이다. 이것은 다비가 주 예수님이 성령이심을 인식했음을 증명한다.

(위트니스 리, 삼일 하나님, 영문판, p. 19)

우리가 아는 바에 의하면 다비 이외에도 고린도후서 3:17을 기초로 주 예수님이 성령이라는 것을 인식한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글에서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다.

1. 앤드류 머레이는 그의 책 “The Spirit of Christ” 25장에서 “우리 주 예수께서 그 영의 생명으로 높여졌을 때 그는 비로소 ‘주의 영(the Lord the Spirit)’ 이 되셨다. 제자들은 신약의 성령을 주시며 성령 안에서 자신이 그의 백성들에게로 나오실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성령의 생명으로 높임을 받으셨을 때였다. 제자들은 예수를 오랫동안 알았으나 영이신 주님으로 알지 못했다. 복음 사역에 있어 영이신 주님을 전하는 대신 십자가에 못 박히신 주 예수에 관해서만 매우 열심히 전하고 있는 것 같다...그리스도를 영이신 주님으로 알고 그리스도의 영이 믿는이들을 자신의 형상으로 변화시키고 있다는 것에 대한 인식이 교회 안에 살아있을 때에 비로소 믿는이들 안의 사역은 생명과 능력이 될 것이며 그것은 참으로 영의 직분(그 영의 사역, the Ministry of the Spirit)이 될 것이다.

2. 헨리 알포드(Henry Alford, 신약 헬라어 단어의 의미 분야 권위자)는 “The New Testament for English Readers” 2권 265쪽에서 고린도후서 3:17에서 “‘주’-여기서는 그리스도를 의미-는 영이라고 하고 있는데 이는 성령과 동일하다...여기서 그리스도는 그리스도의 영이다.”라고 쓰고 있다.

3. 마빈 빈센트(Marvin R. Vincent)는 그의 “Word Studies in the New Testament” 3권 308쪽에서 “16절의 주 그리스도는 새 언약인 신약의 전반에 퍼져서 생명을 불어넣어 주고 있는 그 영”이라고 했다.

(위트니스 리, 삼일 하나님, 영문판, p. 19-20)

4. 제이 오스왈드 샌더스(J. Oswald Sanders)는 “Spiritual Maturity" (무디 출판사) 144쪽에서 다음과 같이 쓰고있다: “윌리암 바클레이(William Barclay)는 이렇게 말한다: 바울은 부활한 주님과 성령을 동일시한 것 같다. 우리는 바울이 신학을 쓴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기억해야만 한다. 그는 체험을 적었다. 그리스도인의 삶의 체험은 성령의 역사와 부활한 주님의 역사이다. 우리가 받은 강건케 됨과 빛 비춤과 인도하심은 그 영과 부활한 주님으로부터 똑같이 온 것이다. 우리가 그것을 체험하는 한 그것을 어떻게 표현할 지는 그리 중요하지 않다.”

고린도후서 3장의 계시로부터 주가 영이라는 것을 본 사람들은 우리뿐이 아니다. 많은 영적인 사람들이 이것을 보았다. 오늘날 부활한 주님인 그리스도는 생명 주는 영이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그를 “주의 영”(고후3:18)이라 불렀다. 그는 단지 주님이 아니라 주의 영이다.

(위트니스 리, 삼일 하나님, 영문판, p. 20-21)

더우기 고린도전서 15:45는 “마지막 아담은 살리는 영(생명 주는 영, the Life-giving Spirit)이 되었나니”라고 한다. 마지막 아담은 물론 성육신하신 주 예수님이고 생명 주는 영은 물론 성령이다. 성령 외에 또 다른 생명 주는 영이 있을 수 없다. 그러므로 이 구절은 분명하게 주 예수님이 성령이라고 말해준다. 요한복음 14:16-20에서 주님이 하신 말씀들은 이 점을 확증한다. 여기서 주님은 죽음과 부활을 통과해 또 다른 보혜사 - 실제의 영 - 가 되어 우리와 함께 거하고 우리 안에 거하기 위해 오시겠다고 했다. 17절에서 주님은 실제의 영이 와서 너희와 거한다고 했다. 그리고 18절에서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 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라고 말씀하신다. 30년 전 상하이에서 웟치만 니 형제님이 이 단락을 우리에게 설명해 주실 때 그는 17절의 “저”(성령)는 18절의 “나”(주님)라고 강하게 지적하셨다. 사실상 주님은 “그가 올 때 내가 온다. 그는 나고 나는 그다”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성령은 주 예수님이고 주 예수님은 성령이다. 또한 17절에서 주님이 말씀하시길, “실제의 영....너희 안에 거하리라”고 하셨고 20절에서 “나는 너희 안에”라고 말씀하셨다. 이것은 우리 안에 있는 성령이 곧 주님임을 증명한다. 주님은 죽고 부활하셔서 지금 우리 안에 살고 계시다.

(위트니스 리, 삼일 하나님, 영문판, p. 2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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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I. 신격의 충만이 그 안에 거하심.

골로새서 1:
19 아버지께서는 모든 2충만으로 예수 안에 거하게 하시고 (모든 충만이 그 안에 거하기를 기뻐하고, For in Him all the fullness was pleased to dwell)

192 여기서 “충만”은 하나님의 어떠하심의 풍성을 나타내지 않고 그 풍성들의 표현을 나타낸다. 우주 만물과 교회 안에서 나타나는 하나님의 풍성한 존재의 모든 표현은 그리스도 안에 있다. 우주 만물과 교회는 하나님의 풍성의 표현인 그리스도로 가득 차있다. 이러한 ‘충만’은 이것이 기쁘며 이는 그리스도께 기쁨이다.
(위트니스 리, 각주, 영문판, p. 988)

골로새서 2:
9 그 안에는 신성의 모든 충만이 육체로 거하시고

신성의 충만의 체현

하나님의 비밀로서 그리스도는 또한 신성의 충만의 체현이다. 1:19에서 바울은 “아버지께서는 모든 충만으로 예수 안에 거하게 하시고”라고 했다. 그리고 2:9에서 “그 안에는 신성의 모든 충만이 육체로 거하시고”라고 한다. 이 구절들에서 충만은 하나님의 풍성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풍성의 표현을 나타낸다. 그리스도 안에는 신성의 풍성뿐만이 아니라 하나님의 어떠하심의 풍성의 표현 또한 거한다. 신성의 충만이 신성의 표현, 하나님의 어떠하심의 표현임을 보는 것은 중요하다. 신성은 옛 창조인 우주와 새 창조인 교회 둘 모두 안에서 표현된다. 1:19와 2:9모두에서 바울이 충만을 설명하기 위해 “모두” 라는 단어를 쓴 것을 주의하라. 모든 충만 즉 모든 표현은 옛 창조와 새 창조 안에 있다.

신격을 나타내는 2:9의 신성(Godhead)이란 단어는 로마서 1:20의 신성(divinity)과 다르다. 이러한 언급은 그리스도가 신적 존재임을 강하게 의미한다. 그러한 신성은 신격의 충만과 함께 하며 사람의 전통과 세상 것들에 대비된다.

1:19와 2:9에서 우리는 모든 충만의 두 방면을 본다. 1:19에 따르면 모든 충만은 그리스도 안에 거하길 기뻐했다. 2:9에 따르면 모든 충만이 그리스도 안에 육체로 거했다. 이것은 그리스도가 그의 인성 안에서 입은 물질적인 몸을 의미한다. 신성의 모든 충만이 인간의 몸을 가진 그리스도 안에 거한다는 것을 나타내는 것이다. 그의 성육신 이전에 신격의 충만은 영원한 말씀으로 그 안에 거했으나 그 안에 육체로 거하지는 않았다. 그가 성육신으로 육신을 입은 후에 신성의 충만은 육체로 거하기 시작했으며 그의 영화롭게 된 몸(빌3:21) 안에서 영원히 거한다.

(위트니스 리, 골로새서 라이프 스타디, 영문판, p. 151-152)

아들에게 그가 가진 모든 것을 줌으로 아들 안에서 체현 됨

주 예수님이 십자가로 가서 죽기 전 그는 그의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무릇 아버지께 있는 것은 다 내 것이라 그러므로 내가 말하기를 그가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리라 하였노라”(요 16:15). 이 구절은 아버지가 가진 것은 무엇이든지 아들의 것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아들은 그 자신의 이름으로 오지 않았다. 그는 아버지의 이름으로 왔다(요 5:43). 아들은 자신의 뜻을 구하지 않고 아버지의 뜻을 구했다 (요 5:30). 그는 자신의 말을 하지 않고 아버지의 말을 했으며 (요 14:24), 자신의 일을 하지 않고 아버지의 일을 했다 (요 4:34). 그는 누구인가? 그는 아버지와 함께 한 아들이다. 아버지는 아들과 함께 했고 아버지는 아들에게 모든 것을 주었다. 그리하여 아버지는 아들 안에서 체현 되었다 (골 2:9).

(위트니스 리, 신성한 삼일성, 영문판, p. 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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