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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ionships Among the Three in the 신성한 삼일성
생명이시며 생명 주는 분이신 삼일 하나님
과정을 거치고 완결되신 삼일 하나님
삼일 하나님에 대한 전통적인 이단들

위트니스 리를 인용

제 12 장
삼일 하나님의 분배의 최종 완결

I. 일곱 금등대

계시록 1장:
12절 몸을 돌이켜 나더러 말한 음성을 알아 보려고 하여 돌이킬 때에 일곱 금 촛대를 보았는데
20절 네 본 것은 내 오른손에 일곱 별의 비밀과 일곱 금 촛대라 일곱 별은 일곱 교회의 사자요 일곱 촛대는 일곱 교회니라

수세기에 걸쳐서 극히 소수의 그리스도인들만이 등대에 대한 깊은 의미를 접해 왔다. 이 메시지에서 우리는 등대들에 대한 문제의 깊은 속을 엄밀히 탐사할 것이다. 성령의 상징들은 이해하기 어렵다. 왜냐하면 우리는 등대와 같은 상징을 우리의 천연적인 관념대로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의 천연적인 관념에 따른다면, 등대란 단순히 어둠 속에서 빛을 발하는 등을 받쳐 주는 물체이다. 출애굽기 25장의 등대는 순금이요, 스가랴 4장과 계시록에 있는 등대들 역시 금으로 되어 있다. 등대에서 우리는 세 가지 중요한 것들-금, 받침대, 등들을 본다. 등대는 삼일 하나님의 의미를 암시한다. 하나님은 등대가 만들어지는 본질이요, 받침대는 금의 체현(embodiment)이며, 등들은 받침대의 표현이다. 금은 본질(본체)이신 아버지를 상징하고, 받침대는 아버지의 체현이신 아들을 상징하며, 등들은 아들 안에 계신 아버지의 표현인 그 영을 상징한다. 이와 같이 삼일 하나님의 의미가 등대 안에 암시되어 있다.

(위트니스 리, 계시록 라이프 스터디, 영문판 p. 89-90)

출애굽기 25장에서는 받침대를 강조하고, 스가랴서 4장은 등들을 강조하고, 계시록 1장은 재생산(reproduction)을 강조한다. 출애굽기와 스가랴서에서는 등대가 하나이지만 계시록에는 재생산되어 일곱 개가 되었다. 먼저 출애굽기에서는 받침대, 즉 그리스도를 강조하고 있고, 두 번째로 스가랴서는 등들, 즉 그 영을 강조한다. 마지막으로 계시록에서는 받침대와 등들, 즉 그리스도와 그 영이 교회들로 재생산된다. 출애굽기와 스가랴서에는 단지 일곱 등만 있지만, 여기 계시록에는 49개의 등이 있다. 왜냐하면 각 등대마다 일곱 개의 등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의 등대가 일곱 개가 되었고, 일곱 개의 등이 마흔 아홉 개가 되었다. 계시록에서 등들을 갖고 있는 등대들은 그리스도와 그 영의 재생산이다. 그리스도가 실제화될 때 그분은 그 영이시며, 그 영이 실제화될 때 우리는 재생산인 교회들을 갖는다.
교회는 우주적으로 하나일 뿐 아니라 많은 도시들 안에서도 지방적으로도 표현된다. 온 우주 안에는 오직 한 분의 그리스도, 한 분의 영, 하나의 교회만 있다. 그런데 왜 일곱 교회들이 있는가? 그것은 표현을 위한 필요 때문이다. 존재를 위해서는 하나로 충분하지만, 표현을 위해서는 많은 수가 필요하다, 교회를 알고자 한다면 반드시 교회의 본질과 존재와 표현을 알아야만 한다. 본질적으로 교회, 혹은 모든 교회들은 하나이다. 표현에 있어서 많은 교회들은 많은 등대들이다. 교회란 무엇인가? 교회는 삼일 하나님의 표현이요 이 표현은 땅 위의 많은 지방들에서 보여진다. 교회는 단지 하나의 등대로 상징되는 것이 아니라 일곱 개의 등대들로 상징된다. 계시록 1장에는 우주 안에서 빛을 발하는 49개의 등을 가진 일곱 개의 등대들이 있다. 이것이 예수의 증거이다. 교회는 예수의 증거(간증)이다. 이것은 교회가 본질에 있어서와 표현에 있어서 삼일 하나님의 표현이란 뜻이다. 본질에 있어서 교회는 우주 안에서 하나의 본질(본체)로 되어 있고, 표현에 있어서 교회는 어둠 속에서 삼일 하나님을 표현하기 위해 빛을 발하는 등들을 가진 많은 등대들이다. 본체이신 아버지는 아들 안에서 체현되고, 체현이신 아들은 그 영을 통해 표현되며, 그 영은 교회들로서 완전히 실제화되고 재생산되며, 교회들은 예수의 증거(간증)이다. 만일 우리가 이 이상을 본다면 그것이 우리를 지배할 것이며, 우리는 결코 분열적으로 되지 않을 것이다. 이 이상은 예수의 증거 안에서 우리를 붙들어 주고 보호해 주고 지켜줄 것이다.

(위트니스 리, 계시록 라이프 스터디, 영문판 p. 91-92)

이미 보았듯이 등대는 신성한 금으로서, 그분의 움직이심 안에서 하나님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 구체적인 형태로 체현된 것이다. 받침대의 표현은 빛을 발하는 데 있다. 그 표현이 빛을 발할 때, 그 빛발함은 하나님의 영원한 목적을 이룬다. 이와 같이 등대는 단지 삼일 하나님을 상징할 뿐 아니라 그분의 체현과 표현 안에 있는 삼일 하나님의 움직이심을 상징하기도 한다. 또한 우리가 보았듯이 지방 교회들은 삼일 하나님의 체현과 표현의 재생산이다. 이것은 작은 일이 아니다. 우리는 지방 교회들이 어둔 밤에 빛을 내는 등대들이라고 말하는 것으로 만족해서는 안 된다. 비록 그것이 옳긴 해도, 그것은 다소 얕다. 우리는 지방 교회들이 삼일 하나님의 체현과 표현의 재생산임을 반드시 보아야 한다.

(위트니스 리, 계시록 라이프 스터디, 영문판 p. 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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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I. 포도나무와 가지들

요한복음 15장:
1절 내가 참 포도나무요 내 아버지는 그 농부라
2절 무릇 내게 있어 과실을 맺지 아니하는 가지는 아버지께서 이를 제해 버리시고 무릇 과실을 맺는 가지는 더 과실을 맺게 하려 하여 이를 깨끗케 하시느니라
3절 너희는 내가 일러준 말로 이미 깨끗하였으니
4절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절로 과실을 맺을 수 없음 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
5절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이라
6절 사람이 내 안에 거하지 아니하면 가지처럼 밖에 버리워 말라지나니 사람들이 이것을 모아다가 불에 던져 사르느니라
7절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8절 너희가 과실을 많이 맺으면 내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요 너희가 내 제자가 되리라
16절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 이는 너희로 가서 과실을 맺게 하고 또 너희 과실이 항상 있게 하여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무엇을 구하든지 다 받게 하려 함이니라

거룩한 분배 안에 있는 삼일 하나님의 유기체

가지들이 있는 포도나무는 거룩한 분배 안에 있는 삼일 하나님의 유기체이다. 어느날 주님은 이 포도나무가 우주 안에 있는 유일한 유기체라는 것을 분명히 보여 주셨다. 15장에 있는 포도나무는 작고 지방적이며 개인적인 유기체가 아니다. 그것은 위대하고 단체적이며 우주적인 유기체, 즉 삼일 하나님의 유기체이다.

요한복음에 있는 삼일 하나님

성경의 다른 어떤 책도 요한복음과 같이 삼일성을 완전히 계시하지는 않는다. 이 책 전체는 삼일성과 관련이 있다. 다른 책에서는 여기에서와 같이 실제적으로 계시된 아버지와 아들과 영이 없다. 요한복음 전체는 아버지와 함께 하시며 영과 함께하시는 아들에 관한 책이다. 그러므로 15장에 있는 유기체는 단지 그리스도의 유기체가 아닌 삼일 하나님의 유기체이다.

이 장을 여는 말씀에서 주 예수 곧 아들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나는 참 포도나무요 내 아버지는 농부라.” 당신은 이 장에 그 영이 어디 있느냐고 의아해 할지도 모른다. 그 영은 포도나무 안에 있는 수액, 즉 생명의 즙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를 포함하여 이 유기체를 구성하는 삼일성을 본다. 포도나무의 유기체는 신성뿐 아니라 또한 인성으로도 구성되어 있다. 이 우주적인 유기체가 삼일 하나님과 우리들로 구성되어 있음을 인해 주님을 찬양한다! 사실 우리는 이 유기체의 중요한 부분이다. 이것은 커다란 의미를 가진 문제이다.

(위트니스 리, 요한복음 라이프 스터디, 영문판 p. 605-606)

유기적인 몸 안에서 자라나는 생명이신 하나님

요한복음 15장에 있는 포도나무의 유기체는 전 성경의 초점이다. 하나의 유기체는 생명을 담고 있으며 기관들을 갖고 있는 일종의 유기적인 몸이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요한복음 15장을 단지 우리와 그분과의 관계를 묘사하기 위해 주님이 사용하신 하나의 비유로 생각한다. 그러나 그것은 단지 하나의 비유가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목적의 초점을 계시하는 실제이다. 하나님은 생명이시며, 생명은 자라서 그 자체를 표현하기 위한 유기적인 몸을 필요로 한다. 심지어 꽃씨 속에 들어 있는 생명 요소조차도 유기적인 몸이 필요하다. 그 씨는 유기적인 몸에 의하여 그 안에 있는 생명이 자람으로 완전히 표현될 수 있다. 하나님은 유기적인 몸 안에서 자라 그 몸에 의하여 그분 자신을 표현하기를 갈망하신다. 이 몸은 그리스도의 유기체이며 교회이다.

성경의 초점은 생명이신 하나님이 유기적인 몸 안에서 자라는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이 자라는 생명이시며, 그 자라나는 생명에는 유기체 즉 유기적인 몸이 필요하며, 그 안에서 하나님은 자라 그를 통하여 그분 자신을 표현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의 창조자이시고 우리의 경배의 대상이시며, 피조물들인 우리는 그분을 경배해야 한다는 말을 들어 왔다. 비록 이것이 틀린 것은 아니지만 그것은 성경에 있는 계시를 매우 피상적으로 이해하는 것이다. 그것은 결코 하나님의 계시의 초점의 중심 내용이 아니다.

거룩한 초점의 중심 내용은, 하나님이 우리의 창조자이시고 우리의 경배의 대상일 뿐 아니라 그분이 생명이시라는 것이다. 생명은 경배를 요구하지 않는다. 카아네이션 씨를 탁자 위에 놓고 그것에 경배한다면 그것은 얼마나 어리석은 짓인가! 만일 당신이 이렇게 할 때 카아네이션 씨가 말을 할 수 있다면 이렇게 말할 것이다. “어리석은 사람아, 무엇을 하고 있는가? 네가 나를 경배할수록 나는 더 고통을 받는다. 나를 경배하는 대신에 흙 속에 뿌려다오. 네가 이렇게 한다면 나는 행복할 것이다.” 궁극적으로 하나님은 우리의 경배의 대상이 아니다. 그분은 생명이시며 그분의 갈망하시는 것은 그분이 표현될 수 있도록 유기적인 몸 안에서 자라는 것이다.

(위트니스 리, 요한복음 라이프 스터디, 영문판 p. 606-607)

그리스도의 내주하심은 우리를 삼일 하나님의 유기체의 부분이 되게 함

주 예수께서 죽고 부활하여 아버지께 비밀리에 승천하시고 난 후, 그분은 같은 날 육신적인 몸을 갖고 잠겨 있는 방에 비밀스럽게 들어오셨다(20:19). 어떠한 과학자나 학자도 그리스도께서 어떻게 그 방 안으로 들어오셨는지 설명할 수 없다. 20장 22절에 의하면, “그분은 제자들에게 숨을 내쉬며 가라사대 성령을 받으라”고 하셨다. 외견상으로는 이것이 요한복음의 결론이지만 사실상 이 복음은 아직 완성되지 않았다. 제자들 안으로 내쉬어진 주님의 호흡은 이 비밀스럽고 만유를 포함한 분이 그들 속으로 들어갔다는 것을 가리킨다. 요한복음 20장에는 주님이 제자들을 떠나셨다는 기록이 없다. 그분이 오셨지만 그분은 떠나지 않으셨다. 그들에게 숨을 내쉰 후에 그분은 그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지 않으셨다. “잘 있거라. 다음에 다시 오겠다.” 젊어서 이 장을 읽을 때 나는 여기에서 주님이 제자들을 떠나셨다고 말하는 기록이 없는 사실로 인해 난처했었다. 후에 나는 주님이 그들 안으로 호흡되셨을 때 그분이 그들 안으로 들어가셨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분은 더 이상 제자들 밖에 있지 않다. 그분은 그들 안에 있었다.

태초에 즉 영원 과거에 그리스도는 공간과 시간에 관계가 없었다. 그분은 하나님의 표현이신 말씀으로 존재하셨다. 그러나 요한복음 끝에서 그분은 비밀스러운 방법으로 우리 안으로 들어오셨다. 그 누구도 접촉할 수 있고 볼 수 있는 육신적인 몸을 가진 분이 닫혀 있는 방 안으로 들어오실 수 있는 것을 설명할 수 없는 것 처럼 그 누구도 어떻게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거하실 수 있는지를 설명할 수 없다. 원칙은 각각의 경우에 있어서 동일하다. 그리스도의 내주하심은 비밀스럽다. 이 책의 서두에서 그리스도는 우리와 멀리 떨어져 있었으나 지금 그 분은 우리 안에 계신다. 시간과 공간에 관한 한 더 이상 그분과 우리 사이에는 거리가 없다. 그분과 우리는 하나이다. 더 나아가 그리스도는 우리를 그분 자신의 일부로 만들었다. 이 하나 됨은 포도나무에 의해 예시된 유기체로서 거룩한 분배 안에 있는 인성을 가진 삼일 하나님의 유기체이다. 오늘날 우리는 이 유기체 안에 있다. 우리 모두는 이에 대한 분명한 이상이 필요하다.

(위트니스 리, 요한복음 라이프 스터디, 영문판 p. 608-609)

교회를 삼일 하나님의 체현이라고 말하는 것은 교회를 신격의 일부분이나 숭배의 대상으로 만드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교회가 하나님으로 태어나(요 1:12-13), 하나님의 생명을 소유한(요일 5:11-12), 하나님의 본성을 누리는 실체라는 뜻이다(벧후1:4). 교회는 거룩한 본질을 가지고 있으며, 그리스도의 모양을 지니고 있고, 하나님 자신을 표현한다. 우리는 하나님에게서 태어났기 때문에 분명히 하나님의 생명을 가지고 있고, 그분의 본성을 소유하고 있으며, 매일매일 그분의 생명과 본성을 누리고 있다. 우리는 그분의 긍휼과 은혜로 우리의 타고난 생명으로 살지 않고 거룩한 생명과 그 본성으로 사는 것을 배우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가 변화되어감에 따라서 그리스도의 충만과 표현과 형태와 모양이 있을 것이며 우리 자신에 의해서가 아니라 칠 배의 강화된 영에 의하여 빛을 낼 것이다.

교회는 그분을 표현하는 삼일 하나님의 체현이다. 그리스도의 지체들인 우리는 그분에게서 태어난 하나님의 아들들로서, 그분의 생명을 가지고 있고 그분의 본성을 소유하고 있다. 우리는 이 풍성한 그리스도로 채워지고 적셔지기 위하여 이 생명과 본성에 의하여 살도록 최선을 다함으로 칠 배의 강화된 영을 통하여 그분의 표현이 될 것이다.

이것이 지방 교회이다. 이것은 단지 외적인 모임이 아니다. 이것은 내적인 생명에 속한 것으로서, 하나님 자신을 표현한다. 사랑하는 성도들이여, 이것이 하나님의 목표이다.

(위트니스 리, 성경의 기본 계시, 영문판 p. 68-69)

가지들은 아들 안에 있는 믿는이들임

포도나무 외에는 다른 어떤 식물도 우리와 주님 사이의 살아 있는 관계를 충분히 예시 할 수 없다. 우리는 포도나무의 가지들이다. 이것은 어떤 종류의 관계를 당신에게 제시해 주는가? 가지들은 포도나무를 표현하는 것 외에는 아무 데도 소용없다. 포도나무 자신의 모든 것과 그가 가진 모든 것은 가지들을 통해 표현된다. 개인적으로 그 가지들은 거듭난 자들이다. 단체적으로 그들은 교회 곧 그리스도의 몸이다(엡 1:22-23). 가지들 곧 아들 안에 있는 믿는이들은 열매 맺음을 통해서 아들과 아버지를 표현하기 위해 존재한다.

열매 맺음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속 생명의 풍성이 넘쳐 흐른 것이다. 당신 자신의 노력으로 사람들을 그리스도께 이끌려고 하지 말라. 영혼들을 구하려고 책략을 쓰지 말라. 열매 맺음은 당신의 속 생명이 넘쳐 흐르는 문제이다. 우리는 끊임없이 그리스도를 우리의 모든 것으로 누려야 한다. 그럴 때 우리는 속 생명의 풍부함을 갖게 될 것이다. 이 속 생명의 풍부함으로부터, 다른이들에게 도달하여 그들의 생명 안으로 스며들어가게 되는 하나의 흐름이 나올 것이다. 이 흐름은 많은 열매를 맺을 것이다. 그것은 단지 말씀 전파나 혼을 얻는 것만이 아니다. 그것은 속 생명의 풍성이 넘쳐 흐름으로써 열매 맺는 것이어야 한다.

(위트니스 리, 요한복음 라이프 스터디, 영문판 p. 401-402)

이제 우리는 생명의 흘러 넘침에 의해 열매를 맺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이해할 수 있다. 우리는 이 이상을 볼 필요가 있다. 만일 우리가 이것을 본다면 우리는 이렇게 말할 것이다. “나는 삼일 하나님의 유기체의 부분입니다. 날마다 나는 나의 하나님을 접촉하고, 그분을 마시고, 그분을 먹고, 그분에 의해 살고 있습니다. 이제 자연스럽게 바로 이 하나님이 나로부터 흘러납니다.” 이 생명의 흘러 넘침은 우리의 열매 맺음이다. 우리의 열매 맺음은 우리로부터 살아 나오시는 하나님이다. 우리가 우리의 친척과 이웃과 동료와 친구와 함께 있을 때 우리는 이같은 부류의 생활을 살아야 하며, 이같은 부류의 사람이 되어야 한다. 최근에 한 자매는 공항에서 어떤 여자를 만나 자연스럽게 그녀에게 그리스도 안에 있는 그녀의 풍성한 공급을 간증한 것에 대해 나누었다. 그 여자는 분명히 자매의 간증에 의해 인상받았을 것이다. 우리 자매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것은 단지 가르침이 아니었다. 그것은 그녀로부터 살아 나오는 삼일 하나님이었다. 만일 우리가 우리의 친척과 친구들에게 이같은 간증을 한다면, 그들은 생명의 흘러 넘침으로 인상받을 것이며, 이 흐름은 분명히 그들 중 몇 사람 안으로 들어갈 것이다. 그들은 그 흐름으로 주입될 것이며, 이 유기체에 의해 탄생된 열매가 될 것이다. 이것은 속 생명의 흘러 넘침에 의한 열매 맺음이다.

우리는 거룩한 포도나무의 가지들이며, 삼일 하나님의 유기체의 부분이다. 생명과 본성과 지위에 있어서 우리는 그분과 동일하다. 할렐루야! 우리는 날마다 우리의 하나님을 접촉하고 있다. 그분은 다만 우리의 경배의 대상이 아니라 생수로 우리 안에 계신 그 영이시다. 우리가 그분을 마시고 먹을 때 우리에게는 생명의 넘쳐 흐름이 있다. 이 흘러 넘침은 우리의 일상 생활에서의 열매 맺음이다. 우리가 접촉하는 자들이 이 흐름을 영접할 것인지의 여부는 하나님의 선택의 문제이다. 그러나 우리가 확신할 수 있는 것은, 선택된 자들은 그것을 영접할 것이며 거룩한 유기체에 의해 탄생된 열매가 되리라는 것이다. 이것이 유기체가 증가하는 방법이며, 하나님의 왕국이 확산되는 방법이다. 이것이 속 생명의 흘러 넘침에 의해 열매맺는 것이 의미하는 바이다.

(위트니스 리, 요한복음 라이프 스터디, 영문판 p. 611-6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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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II. 새 예루살렘

계시록 21장:
2절 또 내가 보매 거룩한 성
1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니 그 예비한 것이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더라
18절 그 성곽은
1벽옥으로 쌓였고 그 성은23금인데2맑은 유리 같더라

21 “새 예루살렘”은 모든 세대에 걸쳐서 하나님에 의해 구속함을 받은 모든 성도들로 이루어지는 살아 있는 구성체이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배필인 “신부”이고(요3:29), 하나님의 거처인 “거룩한 성”이다. 이것은 성, 곧 하늘에 속한 예루살렘(히12:22)으로서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이를 예비하셨고,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은 이것을 갈망했다(히11:10, 16). 이것은 또한 위에 있는 예루살렘이고 우리 모두의 어머니이다(갈4:26). 하와가 아담, 곧 그녀의 남편에게서 나와 그의 배필이 된 것같이 (창2:21-24), 그리스도의 신부인 새 예루살렘은 “그녀의 남편”인 그리스도에게서 나와 그의 배필이 된다. 그녀는 그리스도의 생명의 풍성과 그분의 본성에 참여함으로써 “예비된다”. 하나님의 거룩한 성으로서의 그녀는 전적으로 하나님께로 거룩케 되고 하나님의 거룩한 본성으로 온전히 적셔져서 그분의 거처가 된다.
구약과 신약에서 모두 하나님은 그분의 택한 백성들을 배필로 비유하고(사54:6, 렘3:1, 겔16:8, 호2:19, 고후11:2, 엡5:31-32). 그분을 위한 거처로 비유한다.(출29:45-46, 민 5:3, 겔43:7, 9, 시68:18, 고전3:16-17, 6:19, 고후6:16, 딤전 3:15). 배필은 사랑 안에서 그분의 만족을 위한 것이고 거처는 표현 안에서 그분의 안식을 위한 것이다. 이 두 면이 모두 새 예루살렘에서 궁극적으로 완성될 것이다. 하나님은 그녀에게서 영원히 사랑 안에서 최고의 만족을 얻고 표현 안에서 최상의 안식을 취하실 것이다.
(위트니스 리, 각주, 영문판 p. 1417)
181 “벽옥”은 하나님의 겉 모양이다(4:3). 따라서 벽옥의 성곽은 영원 안에서 하나님의 단체적인 표현인 온 성이 하나님의 겉 모양을 지님을 상징한다.
182 혹은 “맑은”
183 금이 하나님의 거룩한 본성을 상징하기 때문에 “순수한 금”인 성은 새 예루살렘이 전적으로 하나님의 거룩한 본성에 속한 것임을 상징한다. “순수한 유리 같은 순수한 금”은 전체의 성이 투명하며 조금도 불투명하지 않음을 상징한다.
(위트니스 리, 각주, 영문판 p. 1422)

이제 우리는 마지막 표적인 새 예루살렘에 이르렀다. 새 예루살렘은 모든 등대들의 집합체이다. 이 책의 처음에는 일곱 등대, 즉 이 시대의 지방적인 등대들이 있다. 이 책의 끝에는 집합적인 구성체인 등대가 있는데, 그것은 지방적인 것이 아니라 영원한 것, 즉 우주적인 것이다. 계시록은 등대들로 시작하여 등대로 끝난다. 등대들은 교회들의 표적이다. 새 예루살렘도 등대로서, 하나님의 거처의 표적이다.

(위트니스 리, 성경의 기본 계시, 영문판 p. 118)

거룩한 말씀을 연구하고 이해하는 데 있어서 그리스도인들은 종종 타고난 생각을 가져 온다.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우리는 새 예루살렘에 거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새 예루살렘을 물질적인 성으로 생각하지 말아야 한다. 우리의 거처가 되는 것은 하나님이다. 나는 어렸을 때, 어떤 성경 교사들이 우리가 “하늘에 속한 집”에서 무엇을 먹으며 화장실은 어디에 있는지에 대하여 토론하는 것을 들었다. 우리의 천연적인 생각을 가져오는 것이 얼마나 가련한 일인지!

오늘 나는 몇몇 성도들에게, 그들이 교회 안에 있는지를 물어 보았다. 그들이 “예”라고 대답했을 때, 나는 그들에게 교회를 보여 달라고 요구했다. 신약에서는 우리에게 교회가 하나님의 집이며, 하나님이 그분의 집에서 거하고 계신다고 말한다. 그러나 어디에 교회가 있는가? 하나님의 집이요 우리의 집인 교회는 물질적인 건물이 아니라, 살아 있는 믿는이들의 구성체이다.(벧전 2:5). 그것은 생명 없는 물질적 실체가 아니라 살아 있는 사람들의 유기적인 구성체이다. 그것은 어디에나 믿는 이들이 모이는 곳에 존재한다. 오늘날 하나님의 집인 교회는 살아 있는 사람들의 구성체요, 하나의 단체적인 사람이다. 이것은 이 시대에나 영원 가운데에서나 마찬가지일 것이다.

(위트니스 리, 성경의 기본 계시, 영문판 p. 120-121)

온 성경의 일관성

하나님의 집에 대한 생각은 구약에도 있다. 시편 90편 1절에서 모세는 “주여, 주는 대대에 우리의 거처가 되셨나이다.”라고 말한다.

주 예수님은 사람이 그분을 사랑하면 그분의 아버지와 그분이 그 사람에게 가서 그 사람과 함께 거처를 정하겠다고 하셨다(요14:23). 우리는 그분의 거처가 되고, 그분은 우리의 거처가 되실 것이다. 요한복음 15장에서 주님은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4절)고 말씀하신다. 요한일서 3장 24절과 4장 15절에서는 우리가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한다고 말한다.

이 교회시대에 우리는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은 우리 안에 거하신다. 여러분은 우리가 새 하늘과 새 땅에 들어갈 때 우리는 하나님에게서 빠져나가고, 하나님은 우리에게서 빠져나가신다고 믿는가? 이 시대에 우리가 하나님 안에 거할 수 있고, 그분을 우리의 거처로 삼고 우리 안에 있는 곳을 하나님께 드리면서 영원 가운데서는 그분을 우리의 거처로 삼지 않고 정금성을 거처 삼고 산다고 생각하는 것은 논리적인 것이 아니다.

우리는 우리가 주 안에 거하고 그분이 우리 안에 거하는 것이 최고도로 강해지고 확장되고 고양되리라고 믿어야 한다. 이 때문에 요한은 그성 안에서 성전을 보지 못하고, “이는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와 어린양이 그 성전이심이라”(계 21:22)고 말한다. 이것은 그 성이 물질적인 장소가 아님을 강하게 가리키는 것이다. 이 성 안에서 성전은 하나의 인격이다. 이 인격은 하나님과 어린양이다. 삼일 하나님 자신이 성전이다. 그 성 안에 있는 성전이 인격이라면 그 성을 생명 없는 것이라고 믿는가?

그 성전이 거룩한 인격, 즉 삼일 하나님 자신이므로 그 성도 분명 인격일 것이다. 사실상 온 성은 세 가지 차원에서 규격이 같은 지성소이다(왕상6:20, 계21:16). 삼일 하나님이 성전이고 온 성이 지성소이기 때문에, 그 성은 물질적인 것이 될 수 없다. 그것은 분명 유기적인 구성체일 것이다.

신약 시대에 이 땅에 있는 하나님의 거처는 맨 먼저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였다. 그분이 하나님의 장막이었다. 그분 다음에 교회가 하나님의 성전이다(엡 2:21-22, 고전 3:16). 한 사람 예수는 하나님의 장막이요 거처였다. 다음에 단체적인 사람인 교회가 하나님의 성전,하나님의 거처가 되었다. 이것이 신약이다. 신약 시대 후에, 우리가 영원 가운데 들어갈 때에도 하나님의 거처가 살아 있는 사람으로부터 생명 없는 물질적인 성으로 바뀌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거처로 함께 지어진 이 사람들이 확장되고 강해지리라고 믿어야 한다. 앞으로 올 시대에는 하나님의 거처인 이 살아 있는 사람들의 확장이 있을 것이다.

(위트니스 리, 성경의 기본 계시, 영문판 p. 121-122)

글자 그대로의 성이 아님

새 예루살렘이 금과 진주와 보석으로 만들어진 실제적인 성이라면, 그것은 물질적인 성이 온 계시의 결론이라는 뜻이다. 이것은 논리적인 것이 못 된다. 하나님은 모든 시대를 통하여 역사하시고 계신다. 먼저 그분은 우주를 창조하셨다. 다음에 그분은 사람을 창조하셨다. 그 후에 그분은 사람을 구속하기 위하여 육신이 되셨다. 그분은 이 땅에 사시고, 십자가에 달리셨으며, 부활하시고, 승천하시고, 그분의 제자들에게 자신을 그 영으로 부어주셨다. 다음에 제자들은 복음을 전하러 나갔다. 많은 사람들이 구원을 받고 교회에 더해졌다. 그들은 그리스도를 표현하는 몸으로 건축되어 가고 있다. 여러분은 그 마지막 산출을 하나님이 다만 물질적인 성을 얻는 것이리라고 믿는가? 여러분은 그것을 하나님의 의도라고 생각하는가?

만일 이것이 사실이라면 하나님은 형편 없는 건축가일 것이다. 창조, 성육신, 십자가, 부활, 승천, 교회의 건축, 각 세대를 통하여 성도들을 완전케 하심으로 하나님은 문자 그대로의 큰 성보다 훨씬 더 큰 것을 예비하시는 것이다. 하나님은 이미 성보다 더 찬란한 것-우주-을 창조하셨다. 태양계는 아름답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것으로 만족하시지 않는다. 어떻게 그분이 미국의 반 만한 하나의 성으로 만족하실 수 있겠는가? 그러한 이상, 그러한 표적을 천연적으로 해석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오늘날 교회는 우리의 집이다. 교회에 올 때, 우리는 집에 오게 된다. 교회는 하나님 안에 있다. 하나님과 함께 하는 교회생활은 어느 곳에나 있다. 달라스, 휴스턴, 홍콩, 전세계에 교회가 있다. 왜 새 예루살렘에 우리의 집이 있을지 없을지를 걱정하는가? 우리는 이에 대해 걱정할 필요가 없다. 하나님은 이러한 물질적인 것에는 관심이 없으시다. 이러한 물질적인 생각은 사라져야 한다.

(위트니스 리, 성경의 기본 계시, 영문판 p. 122-123)

하나님의 영원한 거처

하나님이 관심 하시는 것은 그분의 선택받고 구속받고 거듭나고 변화되고 영화롭게 된 사람들의 살아 있는 구성체이다. 이 모든 사람들은 영원히 하나님을 표현하기 위하여 함께 건축될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을 영원히 만족시킬 것이다. 사탄은 불못에 있게 될 것이다. 하나님은 그분의 살아 있는 거처에 계실 것이다. 그분이 창조하고 선택하고 구속하여 거듭나고 변화된 모든 사람들은 그분의 형상으로 영화롭게 될 것이다. 그분은 그들 안에 사시고, 그들은 그분 안에 살 것이다. 아무도 그렇게 심오한 관념을 적절히 설명할 수 없다. 기이하다! 이것이 하나님의 거처요, 그분의 사랑하는 아들 그리스도의 아내이다. 어떤 물질적인 건물은 아내가 될 수 없다. 아내는 유기적인 것이요, 살아 있는 인격이다.

새 예루살렘은 새 하늘과 새 땅에서의 하나님의 거처를 상징한다. 신약에서 이 땅에 있는 하나님의 거처는 첫 번째로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였는데, 장막으로 상징되었다(요1:14). 그 다음에 단체의 사람인 교회는 성전으로 상징되었다(고전 3:16).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어린양의 아내(계21:9-10)인 하나님의 거처도 열 두 지파로 대표되는 구약의 성도와 열 두 사도로 대표되는 신약의 성도로 구성된, 그분의 구속받은 백성들의 살아 있는 구성체이다(계21:12, 14).

하나님의 거처가 되기 위하여 함께 건축되는 이 사람들은 먼저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통하여 거듭남을 체험한다. 이것은 그 성으로 들어가는 입구인 진주 대문으로 상징된다. 진주는 죽음의 물에 있는 살아있는 생물인 굴에 의하여 산출된다. 모래알이 굴에 상처를 줄 때, 그것은 그의 본질을 모래 주위에 분비하는데 그것이 모래를 진주로 만든다. 굴의 상처는 죽음을 상징하고 모래알 주위에 뿌린 생명의 즙은 부활의 생명을 상징한다. 예수의 죽음과 부활은 거듭남을 통하여 우리를 진주로 만든다. 거듭나지 않고는 누구도 하나님의 왕국에 들어갈 수 없다(요3:5).

거룩한 성에서 하나님의 본성, 혹은 하나님의 본질은 우리의 기본 요소가 되는데 그것은 금으로 상징된다(계21:18下, 21下). 본래 그 성은 금이며 길도 금이다. 모든 믿는이들의 본질은 바로 하나님 자신이다.

그 영의 역사에 의하여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변화될 것인데 그것은 벽옥으로 상징된다. 아버지의 본성(금), 아들의 구속, 우리의 거듭남(진주), 그 영의 변화시키는 역사(보석)는 하나님의 이 영원한 거처를 구성하는 모든 구성 성분을 산출한다. 하나님의 거처가 또한 우리의 거처이다. 우리는 영광 가운데 하나님을 표현하는 하나님의 지성소로 함께 건축되어 갈 것이다.

(위트니스 리, 성경의 기본 계시, 영문판 p. 123-124)

거룩한 성이 또한 하나님의 거처이다(계21:3). 하나님과 그리스도께서 이 성 안에 거하신다. 한편으로 그분들은 우리가 그 안에 거할 성전이고, 다른 한편으로 그분들은 또한 그 성안에 거하는 거주자들이다. 이것은 새 예루살렘이 상호 거처임을 의미한다. 하나님은 우리 안에 거하시고, 우리는 하나님 안에 거한다. 오늘날 교회는 하나님이 거하시는 거처요(엡2:22) 하나님은 우리가 거할 집이다(시90:1). 그것은 새로운 개념이 아니다. 그리스도는 요한복음 15장에서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고 말씀하셨다(4절). 사실상 그분은 “나는 너희의 거처이고 너희는 나의 거처이다”라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과 함께 서로 거처가 된다. 얼마나 심오한가! 하나님께 대하여 우리는 성이고 우리에게 대하여 하나님과 그리스도는 성전이시다. 우리는 우리의 성전이신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임재를 갖는다. 우리는 단지 하나님의 임재와 그리스도의 임재 앞에 있을 뿐 아니라 하나님의 임재와 그리스도의 임재 안에 있는 것이다.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임재가 우리를 위한 성전이 된다. 만일 우리가 교회 안에서 하나님과 그리스도를 섬기려면, 우리는 하나님과 그리스도로 둘러싸이고, 하나님과 그리스도로 덮여져야만 한다. 우리는 하나님과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과 그리스도를 섬겨야 한다. 오, 얼마나 우리에게 그 분이 필요한지! 그분은 우리가 섬길 분이고, 그분은 심지어 우리가 그 안에서 섬길 성전이다. 당신은 그러한 방법으로 하나님과 그리스도를 섬기는가? 이것은 아주 주관적인 것이다.

인간의 논리는 그러한 상호거처가 불합리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어떤 이들은 “그러면 도대체 누가 안에 있고, 누가 밖에 있는가? 만약 하나님과 그리스도가 우리 안에 계신다면 우리는 결코 하나님과 그리스도 안에 거할 수 없다.”고 물을지 모른다. 그러나 생각해 보라. 공기는 우리 안에 있고 또한 우리 밖에도 있다. 공기는 내 안에 있고, 나는 공기 안에 있다. 공기가 내 안에 있지 않다면, 나는 즉시 죽을 것이다. 그리고 만약 내가 공기 안에 있지 않다면 나는 결코 숨쉴 수 없을 것이다. 이러한 주관적인 사실을 믿는 것은 어렵지 않다.

하나님과 그리스도는 당신 안에 계시고, 당신은 하나님과 그리스도안에 있다. 그분을 찬양하자. 우리는 생활에서 이것을 실제로 체험할 수 있다. 어느 날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우리는 가장 완전하게 이것을 알게 될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과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얼마나 많은 것이 되시는 지를 볼 것이다. 그분이 우리 안에 거하고, 우리는 그분 안에 거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분의 임재를 최대한도로 누릴 것이다.

(위트니스 리, 하나님의 건축의 이상, 영문판 p. 223-224)

삼일 하나님과 세 부분으로 된 사람의 연합

새 예루살렘에서 삼일 하나님은, 구속받고 거듭나고 변화되고 영화롭게 된 세 부분의 사람과 완전히 연합하신다. 이 연합은 열 둘이라는 숫자로 상징되는 하나님의 영원한 거처이다. 열 둘은 셋 곱하기 넷이다. 그 성은 네 면이 있는 사각형이기 때문에 우리는 이것을 안다. 한 면에 세 개의 문이 있다(21:13). 영원에서 새 예루살렘은 단지 더해진 것이 아니라 절대적인 연합일 것이다. 그것은 곱해진 것-삼일 하나님(3) 곱하기 사람(4)이다.

새 예루살렘에서는 열 둘 이라는 숫자가 열 네 번 사용된다. 열 두 보석의 열 두 기초는 열 두 사도의 이름들을 지니고 있다(21:14, 19-20). 열 두 천사들이 있는 열 두 진주의 열 두 대문은 열 두 지파의 이름을 지니고 있다(21:12, 21a). 그 성의 규격은 세 가지 차원에서 열 두 번의 천 스타디온이다(21:16). 그 벽의 높이는 일 백 사십 사 규빗으로(21:17a). 그것은 열 둘 곱하기 열 두 규빗이다. 생명나무는 일 년 열 두 달 매달에 열 두 가지 실과를 맺는다(22:2). 그렇게 여러 차례 나타나는 열 둘 이라는 수는 그 거룩한 성이 삼일 하나님과 세 부분의 사람과의 연합임을 의미한다.

(위트니스 리, 성경의 기본 계시, 영문판 p. 135)

그분의 구속된 자들과 삼일성과의 연합

새 예루살렘은 신성한 삼일성과 하나님의 구속된 백성들의 구성체이다. 무엇보다도 먼저 그것은 금으로 상징되는 아버지 하나님의 본성으로 구성된다. 그 성과 그것의 길은 그분의 본성 안에서 아버지 하나님을 가리키는 정금으로 되어 있다(계21:18, 21下). 새 예루살렘의 열 두 문은 열 두 진주인데(계21:21上), 그것은 아들 하나님의 승리하는 죽음과 생명을 나눠주는 부활을 상징한다. 조개는 죽음의 바다에서 사는 작은 동물이다. 그것은 죽음의 바다를 이기는 생명을 가지고 있으며 생명 요소를 분비함으로써 진주를 산출한다. 그리스도의 승리하는 죽음에 그분의 생명을 나눠주는 부활이 더해져서 우리를 진주로 형성하는 신성한 생명의 “즙”이 분배된다. 이처럼 우리는 진주에서 그분의 죽음과 부활 안에 계신 아들을 볼 수 있다. 진주는 하나님의 구속받고 거듭난 백성을 상징한다. 요한복음 3장에 따르면, 거듭남은 왕국 안으로 들어가는 입구이다. 당신이 그 영으로 나지 않는 한(요3:5), 당신은 하나님의 왕국 안으로 들어갈 수 없다. 거듭남은 새 예루살렘으로 들어가는 입구요 문이다.

보석들은 영 하나님의 변화시키는 역사를 상징한다(계21:11, 18-20). 거듭남 이후에 그 영은 하나님의 거듭난 백성들 각각을 보석으로 만들기 위해 계속해서 변화시키신다. 이로써 당신은 새 예루살렘이 본질이신 아버지와 입구이신 아들과 변화시키시는 영으로 구성되어 있음을 볼 수 있다. 그것은 삼일성과 구속되고 거듭나고 변화된 인성으로 된 건축이다.

(위트니스 리, 신성한 삼일성, 영문판 p. 144-145)

새 예루살렘 전체는 아버지 하나님과 어린양, 곧 아들 하나님의 보좌로부터 흐르는 생명수의 강이신 그 영 하나님으로 적셔진다. 강 안에서는 생명나무가 자란다(계22:1-2). 생명수이신 영 하나님은 목마름을 해소시키시며, 생명나무이신 아들 하나님은 영양분을 공급하신다. 삼일성과 그분의 구속된 백성으로 구성된 성 전체는 다른 것이 아닌 그분의 구속된 백성을 적시기 위해 그분 자신을 분배하시는 삼일 하나님 자신이신 신성한 생명으로 물 줌을 얻고 영양 공급을 받고 적셔진다(계22:1-2, 14, 17). 이것은 어떠한 그림인가! 이것은 삼일 하나님과 그분의 구속된 백성과의 융합(blending)이다. 아버지의 본성은 본질이며, 그분의 죽음과 부활을 포함하는 아들의 구속은 입구이며, 그 영의 변화시킴은 우리를 신성하고 귀하게 만들기 위한 역사이다. 이러한 구성체가 새 예루살렘이다. 그것은 삼일 하나님 자신이신 영원한 생명으로 적셔진다. 이것이 신성한 분배하심의 최종 완성이다.

나는 여러분이 이 메시지들을 통하여 하나님의 경륜에 대한 이상과 하나님의 목표와 그분의 목표에 이르기 위해 하나님이 하고 계시는 것은 그분 자신을 근원인 아버지로서, 표현인 아들로서, 바로 입구인 영으로서 당신과 내 안으로 분배하시는 것이다. 주야로 그분은 줄곧 이 한 가지 일을 하신다. 그분은 이 한 목표를 향해, 즉 우리 모두가 이 시대에서는 삼일 하나님을 표현하는 등대가 되며, 결국 영원 안에서는 생명이신 삼일 하나님으로 적셔진 구속되고 거듭난 인성의 구성체인 신부가 되는 것을 향해 역사하고 계신다.

(위트니스 리, 신성한 삼일성, 영문판 p. 145-1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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